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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백 the 돼지국밥 Sep 01. 2020

용백슈타인의 간땡이 이론

직장인의 점심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내 간땡이가 얼마나 큰지 작은지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토끼처럼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줄자로 재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다. 간땡이의 크기를 잴 때 사용하는 측정 단위는 센티미터도 아니요 인치도 아닌, 시간이다. 시간도 불필요하게 큰 단위이니 분으로 정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층의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점심시간은 11시 50분에서 1시까지이다. 이 한 시간 십 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간땡이의 크기는 슬프게도 평등하지 못하다. 그래서 각자 누릴 수 있는 점심시간의 시작 시간은 달라진다.



불평등한 간땡이는 아쉽게도 점심시간의 끝 시간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한다. 끝이 나는 시각인 오후 1시는 생각보다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밥을 잘못 먹어 배탈이 났다거나 이를 닦고 온 척을 한다거나, 식당에서 음식이 너무 늦게 나왔다는 둥의 꼼수가 청해지고 그에 걸맞은 관용이 베풀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1시 50분은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간땡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점심시간이 빨라진다. 일반적인 간땡이를 가진 사람들은 50분이 되면 자리에 일어나 엘리베이터 앞으로 모인다. 하지만 이들은 첫 번째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갈 수 없다. 1층에서 15층까지 올라갔다가 12층으로 내려오는 첫 번째 엘리베이터는 그보다 2분 정도 큰 간땡이를 가진 사람들의 차지이다. 48분에 일어나 엘리베이터 앞에 우르르 모인 사람들을 일반 간땡이들은 이길 수 없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가 15층까지 올라와 12층으로 내려오는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 뒷모습이 처량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5분만큼 큰 간땡이와 10분 정도 큰 간땡이를 가진 사람들은 이 싸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때는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몰리지도 않는다. 보통 고독한 경쟁이거나, 많아야 세 명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게 되는데 수요보다 공급이 훨씬 많으니 애초에 누가 이기거나 지거나도 없어 언제나 여유만만한 뒷모습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겐 5분에서 10분만큼 더 큰 간땡이가 있는데 2분은 그저 코찔찔이들의 싸움이겠거니.



나도 처음엔 내 간땡이가 일반적이겠거니 생각했다. 아니 아예 간땡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은 11시 50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옆옆자리 연구원JO에 의해 나는 나의 간땡이를 인식하게 되었고, 내 간땡이의 크기를 직시하게 되었다.



연구원JO를 만난 건 2019년 3월 팀을 옮기고 나서였다. 새로운 팀으로 파견을 가 이것저것 분위기를 파악하고 탐색하고 있던 나에게 연구원 JO는 같이 밥을 먹자며 다가와 주었다. 어떤 메뉴를 먹을 것인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던 가운데, 수많은 후보가 나왔고 우리는 그 중에서 마라탕을 택했다. 점심시간이 약 30분이 남았을 때쯤, 연구원 JO에게서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우리 45분에 미리 나가자!”

내 간땡이가 그렇게 묵직했었다니. 남보다 5분 정도 큰 간땡이의 무게를 처음으로 느꼈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간땡이 주변으로 이루어지는 작용과 반작용의 순리가 너무 무거워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니, 내 간땡이가 이렇게 컸단 말이야? 그리고 그 후로 나는 일반 간땡이와 2분 간땡이들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볼 수 없었다. 5분 간땡이인 줄 알았던 나는 사실 10분 간땡이였고 10분의 기득을 당당하게 누렸다.



  간땡이 계의 아인슈타인은 일반간땡이이론으로 시간의 빠르기를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시공간의 차원이 직선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가설에 대한 증명은 지금 논할 필요는 없으니 가볍게 건너띄기로 하고, 알아차리기 쉽게 삼단논법으로 이 이론을 설명하고자 한다.


시간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며 상대적으로 흘러간다.

간땡이가 큰 사람의 주변으로는 시간 곡선이 휜다.

간땡이의 크기가 큰 사람의 시간은 간땡이의 크기가 작은 사람의 시간보다 느리게 간다.



간땡이가 크면 큰 사람일수록 그 사람 주변의 시간은 휘기 때문에 점심시간은 누진적으로 늘어난다. 10분만큼 큰 간땡이를 가진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도 금방 탈 수 있고 식당에 가서도 줄을 서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빨리 밥을 먹고 식당을 나설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산책을 하거나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릴 수도 있다. 반면 일반적인 간땡이를 가진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두 번이나 기다려야 하고, 식당에서도 이미 가득 찬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야 하며, 늦게 나온 식사를 후딱 먹고 곧장 사무실로 들어와야 한다. 고작 10분 정도의 시간이, 아니 간땡이의 10분이라는 크기의 차이가 이렇게 시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패러다임인가.  



  동기들과 오랜만의 점심 식사를 약속한 날이었다. 그날은 특히 상무님과 팀장님 파트장님들이 월례 회의로 자리를 비우는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나는 간땡이를 부풀릴 대로 부풀려 35분에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 제안은 처참히 묵살당하고 말았다. 15분 10분 간땡이들은 일반 간땡이들을 품을 수 있는 아량이 있지만, 일반 간땡이들은 10분과 15분 간땡이들을 포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11시 37분에 옷을 입고 문을 나선 사람이 있다. 심지어 팀장님과 파트장님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당신 인정합니다. 당신의 뒷모습에는 태평양만한 여유가 깃들어 있겠군요. 나의 간땡이보다 3분 큰 간땡이는 어떤가요. 태평양을 짊어지느라 무겁지는 않으신가요. 2분 간땡이와 일반 간땡이들을 소시민이라고 속으로 무시했는데, 당신이 보기엔 저도 수많은 소시민 중 하나겠지요. 아무튼 무지막지하게 부은 당신의 간땡이에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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