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와 모기를 통한 업무의 실존과 의미에 대한 고찰
대만에는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가 있다면, 대한민국 현실에는 <뺑이 스토리>가 있다. 당신은 뺑이를 쳐 보았는가? 뺑이는 보통 2년 동안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온 친구들이라면 모두 군대에서 한 번씩은 치고 온다는 헛짓거리이다. 때로 이 친구들은 자신이 타의에 의해 얼마나 많은 뺑이를 쳤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공군으로 군 복무를 하던 친구의 이야기이다.
야. FUCKING 대한민국 뻐킹 ARMY. 내가 들어본 것 중에 나 보다 뺑이 쳐 본 놈은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진짜. 나 공군이었잖아. 비행기가 이제 뜨기 전에 활주로에 야생 동물이 종종 튀어나올 때가 있거든. 근데 동물이 갑자기 나타나서 비행기에 치이면 이게 진짜 개망하는 거야. 동물도 억울하게 목숨 잃는 거고 비행기 기계도 고장 나고, 뒤치다꺼리하는 우리도 고생하고. 그래서 활주로에 야생 동물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게 진짜 중요했단 말이야.
활주로에 고라니가 뛰어들어 왔다고 했다. 군인 몇몇이 차출되어 활주로를 뛰어다니며 고라니를 쫓으려 애썼지만, 야생 동물의 가득 찬 생명력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만을 느낄 뿐이었다고 한다. 의도가 통하지 않는 무자비한 자연의 폭력 앞에서 한 없이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군인들은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하나의 거대한 띠를 이루었고 박자에 맞춰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탁탁 탁탁탁 탁탁탁탁 탁탁
고라니는 생에 처음 보는 거대하고 기다라며 심지어 움직이기까지 하는 띠를 보고 겁에 질렸으리라. 인간 띠는 가두리가 되어 점점 고라니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겁에 질린 고라니는 펄쩍펄쩍 뛰며 발광을 하다가, 마지막 발악으로 거대한 띠를 뚫어 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어느 누가 본능이 이성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손바닥과 손바닥으로 연결된 수많은 군인들의 집단 이성은 고라니의 무조건적 본능에 굴복하고 말았고, 고라니는 비행기가 되어 속력을 높이고 활주로를 누비었다.
어떤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뺑이를 쳤다는 친구에게 쉽사리 고라니의 행방에 대해 더 물을 수 없었다. 맥주를 걸치다 말고 고라니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고라니는 무리를 지어 살기보다는 단독 생활을 하는 동물이란다. 아무리 홀로 사는 동물이라고 해도 비행기가 되겠다는 결정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집단 뺑이 앞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고라니도 그들에게 맞서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잃을 게 더 많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하지만 마지막 남은 선택이었겠지. 이렇게 잡힐 것이냐, 잡히더라도 한 번 들이받아 볼 것이냐.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고라니에게 동질감이 들기 시작했다.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내 안에도 고라니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연차와 직급의 끈이 내 숨통을 조일 때면 생존 본능에 충실한 한 마리의 고라니가 되어 사무실 복도를 활주로 마냥 마구 누비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저 모기 한 마리가 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월세나 핸드폰 요금 같은 조금 더 장기적인 생존 본능이 순간적 욕구를 억누르기에.
나, 용백 the 모기는 연차가 쌓여 가는 만큼 뺑이를 치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이다. 뺑이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나를 뺑이 치게 만든 사람(주로 상사)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 다음 그들의 의도를 묘하게 빗나가서 그 사람 또한 뺑이를 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나보다는 덜 치게 되겠지만. 모기가 되어 내가 공략하는 곳은 귀와 발이다. 귀 옆에 머무르며 위잉 위잉 성가시게 하거나 발바닥을 물어 어디가 가려운지 어디가 아픈지 감도 못 잡은 채로 발을 벅벅 긁게 만드는 그런 집 모기. 산 모기였다면, 약국이나 병원이라도 보낼 수 있을 텐데 산 모기가 될 만큼의 용기가 없다는 것이 슬플 따름이다.
회사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뺑이를 보통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양적 뺑이다. 양적 뺑이는 본업무 외의 분과 업무인 경우가 많다. 일이 단순해서 시간만 여유롭게 준다면, 누구나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흔한 예로 <자산 관리> 업무가 있다. 사무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산을 관리하는 업무인데, 책상부터 의자, 모니터, 패드, 냉장고 등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물품들을 관리하는 성가신 일이다. 자산 관리 담당자는 물건들에 QR 코드가 달린 스티커를 붙이고, 이를 하나하나 스캔하고 관리한다.
이런 양적 뺑이는 이전 인계자의 업무 스타일에 따라 곱절의 뺑이를 치게 될 수 있다. 어느 정도 짬이 찬 선배들은 이런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운만 좋다면 자신들이 자산 관리를 담당하는 기간 동안 전사적 관리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이 터질 때까지 미뤄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후임이 내가 된다면 지옥 뺑이가 시작된다. 자산에 스티커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고, 있어야 할 자산이 없고, 없어야 할 자산이 있는 이 총체적 난국에 나는 그저 아주 느리고 수동적인 나무늘보가 되고 만다. 어차피 팀장님도 이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이 모든 똥을 투척하고 다른 회사로 이직하신 선배님, 지금 제 외침을 보고 계신가요.
두 번째 유형으로는 질적 뺑이가 있다. 깐깐하고 욕심 많은 상사를 만나게 될 때이다. ‘와! 진짜,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라는 회의감이 들지만 보상과 노하우를 직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어 나름 보람차다. 하지만 문제는 상사에게 잘 보이기만을 위한 쇼윈도 뺑이를 하게 될 때이다. 최초 개발이 아닌 기존 업무를 단계로 나눠 순차 개발하는 경우에는 업무의 담당자가 달라지더라도, 업무가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한 담당자가 기존 방식을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도입하였다. 스티브 잡스 수준의 혁신에 우리는 이미 완성한 결과물을 하나하나 뜯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모기는 고라니로 변신할 채비를 시작한다. 모기의 머리에 고라니의 뿔이 돋아나고, 가슴에는 앞다리가, 배에는 꼬리가 돋아난다. 만약 이 일을 파트장이나 팀장이 시켰다면, 난 여전히 모기였겠지. 지독히도 기회주의적이고 직급 지향적인 나는 반모기 반고라니, 모기라니가 되어 사무실을 누빈다. 그리고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완성품의 부분만 잘라내어 파일에 첨부했다. 약간의 글 상자를 추가해 순서를 안내하는 정도로. 모기라니가 작성한 시트는 한 데 모인 취합 파일 중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 부분은 용백이가 했구나! 탁월하다! 라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질적 뺑이다. 주로 무능력하고 센스 없는 상사가 일로써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고 할 때 경험하게 되는 뺑이이다. 신상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아래 직원들의 젊고 감각적인 기획을 받아들이기에는 팀장님의 취향은 너무 “올드”하고 “노 센스”다. 하지만 팀장님은 권력을 쥐고 있다. 기획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어마 무시한 권력을. 기획안을 “올드”하고 “노 센스”하게 수정하여 결재를 올리면 팀장님은 아주 만족하여 이 “올드”하고 “노 센스”한 수정 기획안을 상무님께 결재 올린다. 그럼 “올드”하고 “노 센스”한 기획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트렌디”하고 “뻔(fun)”하며 “메세지”까지 있는 상무님께 대판 깨지게 된다.
쨍그랑~ 쨍그랑~
상무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고 난 후 우리는 다시 기획안을 “트렌디” “뻔” “메세지”에 맞게 수정한다. 그럼 또 수정 기획안은 “올드”와 “노 센스”를 거쳐 “트렌디” “올드” “뻔” “노 센스” “메시지”하게 되고 이 과정을 한두 달을 반복해야지만, 새로운 기획안이 개발 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아주 트렌디하며 올드하고 뻔하며 노 센스한 메시지가 담긴 상품은 또다시 여러 직원들의 뺑이로 제 모습을 갖추어 갈 것이다.
그렇다. 내가 그렇게 성실하고 좋은 직원은 아니다. 하지만 내 안에 고라니가 있다는 것은 조금 더 편하고 효율적인 세상을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의 형상이라 확신한다. 이 글을 통해 만난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난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모두들 마음속에 고라니 한 마리쯤은 품고 있잖아요. 우리 숨기고 살지 말아요. 평소엔 모기로 살아도 가끔은 고라니가 되어 보자구요. 용기를 가집시다. 그럼 오늘도 뺑이 쳐 봅시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