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인심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정부는 ‘대한민국이 직면해 있는 역사적 시련을 극복하고 국토와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체제의 개혁을 단행한다. 이에 수반되는 사회질서의 동요와 혼란을 미리 방지하는 동시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했다.
정부에서는 이 선언이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시키기 위한 원대한 역사적 개혁의 출발점이므로 이를 ‘10월 유신’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해 10월 27일 공고한 헌법 개정안은 11월 21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한다고 발표했다. 결국, 한국적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핑계로 장기 집권을 위한 독재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부처별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전국기관장회의를 소집하여 ‘소속 전 공무원은 10월 유신을 국민에게 지도·계몽하는데 앞장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헌법 개정안 국민 투표일까지는 사무실에 출근도 하지 말고 맡은 지역에 머무르면서 국민들에게 10월 유신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때 나는 스물두 살의 말단 직원이었다. 교통이 가장 불편하여 다른 직원들이 출장 가기를 기피하는 산간오지 3개 면을 담당하게 되었다. 명색이 지도·계몽 요원이었지만, 10월 유신에 관한 교육을 받기는커녕 관련 자료나 유인물조차 보지 못했다. 그것에 관해 아는 것이라고는 신문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산골 마을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두 대 뿐이었다. 대개 밤이 되어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여관이나 식당이 없어 가는 곳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다른 마을로 이동하려면 낯선 산길 몇십 리를 걸어 다녀야만 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먼저 이장 집을 찾아가서 방문 목적을 말했다. 대개 국가 공무원이 자기 마을에 출장 온 것은 처음이라면서 부인에게 저녁 식사를 서둘러 준비토록 하였다. 부인도 당연하다는 듯이 새로 밥을 안치고 이웃집에서 반찬을 얻어 와서 저녁상을 차려 주었다. 식당이 없기 때문에 점심은 대개 굶고 다녔다. 무척 시장해서 염치 불고하고 차려준 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잠은 마을에서 비교적 깨끗한 방이 있는 집으로 안내하였고 다음 날 아침밥을 준비할 집도 미리 정해 주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토끼를 잡아 아침상에 내놓기도 했다. 후한 대접을 받고도 보답을 못해서 가는 곳마다 미안했고 겸연쩍었다. 그 당시 농촌은 가난했지만, 인심만은 최고였다.
이장은 내가 설명할 수 있도록 다음 날 주민들을 한 곳에 모으겠다고 하면서도 ‘그래 봐야 관심을 가지거나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설명을 하나 마나 어차피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농사에 바쁜 주민들을 모으지 말고 다음 모일 기회가 있을 때 이장인 자기가 대신 전달토록 하겠다.’는 말을 에둘러했다. 그 자리에서 확성기로 국가공무원 000가 10월 유신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직접 우리 마을에 왔다고 주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명령에 따라 출장은 갔지만, 처음부터 계몽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이장이 하자는 대로 그렇게 했다. 공무원이 출장 와서 아무것도 아니하고 밥만 얻어먹고 떠나는 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민망하기는 했다. 허울뿐인 10월 유신 지도·계몽 요원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말을 냇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그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격언이 있다. 그때 전 공무원들이 10월 유신 지도·계몽 요원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동원된 공무원들조차도 속마음은 10월 유신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효과는 거의 없었다.
10월 유신은 국민의 지지 없이 출발하여 적지 않은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면서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7년 만에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 변화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10월 유신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