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 생각
뉴스에 나왔다. 먹는 것을 줄여 살을 빼려고 애쓰는 사람이 적지 않은 시대에 아직도 군인들의 급식이 부실하여 문제라니 한심스럽다. 배만 불러도 행복했던 군대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사단장이었던 그분이 지금 현직이라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지가 궁금했다.
사단 예하 보병 중대에 신병으로 배치되었을 때, 닳고 닳아 찌그러진 양재기 2개를 보급품으로 받았다. 구멍이 많이 난 양재기에 꽁보리밥 반 주걱을, 구멍이 적게 난 양재기에 콩나물 몇 개 떠다니는 국을 취사병이 퍼 주었다. 그 외 반찬은 깍두기 서너 쪼가리다.
식욕이 왕성한 시기에 교육·훈련과 사역에 시달리다 보니, 늘 배가 고파서 오로지 먹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간혹 배탈이 난 전우의 대궁밥도 서로 먹으려고 눈치를 보기도 했다. 그 시절 병영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구타, 기합, 심한 욕설보다도 배고픔이 더 고통스러웠다.
당시 육군 예비사단 신병훈련소에서는 면회나 외출·외박이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자대에 가서야 처음으로 외출을 허가받았다. 우선 배부터 채우기 위해 곧장 시외버스를 타고 의정부 시내로 나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뜸 눈에 띄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감투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지만, 배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더 먹으려다 혹시 아들을 군에 보낸 부모들이 보면 괜히 걱정하실까 봐 그냥 나왔다.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면 곱빼기를 더 먹었다. 배는 어느 정도 불렀지만, 식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경양식집으로 가서 돈가스까지 또 먹었다.
잇달아 세 그릇이나 먹고 나서야 포만감을 느꼈다. 배가 부르니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냥 행복했다. 부대로 돌아와서 토사곽란으로 소나기밥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이틀 동안 고생은 했지만, 한 끼라도 실컷 먹었기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장병 복지를 위한다고 부대마다 면세매점(PX)을 운영했다. 천 원 내외인 병사 월급만으로 이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거짓 핑계를 만들어 돈을 부쳐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 뻔히 알면서도 우선 허기를 채우려고 불효도 서슴지 않았다.
매점에서는 상급 부대 검열에 대비하여 정품은 진열대에 전시만 하고, 병사들에게는 팔지 않았다. 정품은 마진(margin)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대신 상품명도, 제조회사도, 유통기한도, 가격표시도 없이 그냥 비닐봉지에 넣은 과자를 주로 팔았다. 겉모양만 유명 제과 회사의 상품과 엇비슷했다. 말단 부대에 근무하는 보병들에게만 파는 것이라 하여 자조적으로 “보병과자”라고 했다.
식량을 빼돌려서 병사들이 정량대로 밥을 먹지 못하고, 매점에서 무허가 제품을 팔아 누군가 폭리를 취하는 줄 알면서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휘관은 그때까지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비호나 묵인 없이는 있을 수 없는 부정부패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사단장으로 그분이 오시면서 그동안의 온갖 폐단은 단칼에 해결되었다. 군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정량의 밥과 반찬을 먹어 보았다. 일주일 후부터는 자유배식제로 바뀌어 먹고 싶을 만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쌀이 남아 특식으로 떡을 해 나누어 먹었다. 매점에서도 “보병과자”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상표가 있는 정품만 팔았다.
그분은 취임 다음 날부터 부사관 복장으로 갈아입고 예하 말단 보병부대 사병식당을 불쑥불쑥 찾아가서 직접 밥과 반찬의 양과 질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기준에 미달하면 그 자리에서 관계자들을 엄중히 문책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이어갔다. 그분이 재직하는 동안 누구도 부정을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기강을 엄정하게 세웠다.
그동안 병사들이 허기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라에서 식량을 적게 주어서가 아니었다. 말단 부대까지 내려오는 과정에서 외부로 빼돌려지기도 하고, 부대 식량창고에서도 쌀자루와 부식을 몰래 빼내 철조망 개구멍을 통하여 밖으로 빠져나가는 양이 적지 않아서였다.
그분은 병사들에게는 강인한 체력 단련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혹독하게 시켰다. 초인적인 100km 장거리 행군도 했다. 부대 내에서는 봄부터 초가을까지 웃옷을 모두 벗고 맨발로만 다니게 하면서 사계절 내내 냉수마찰을 시켰다.
병사들은 모두 새까맣게 그을렸고 발은 곰 발바닥처럼 변하여 무좀은 아예 없어졌다. 그야말로 강군으로 만들었다.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면서, 아버지뻘인 그분이 고된 훈련에도 앞장서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군 급식 부실 문제도 현재 그분이 사단장이라면 아마도 그때처럼 혼자 사병식당으로 불쑥 찾아가서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은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지만, 배만 부르면 그래도 행복했다. 힘들거나 아쉬운 것도 별로 없고 늘 배가 부른 요즈음은 왜 그때처럼 행복하지 못할까. 이미 나에게 주어진 행복만 해도 넘쳐나는데,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내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