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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원 Sep 26. 2023

서울살이

땜빵 강의


통화   

  

 서울살이를 한 지가 40년이 넘었다. 아무런 계획이나 준비 없이 서울로 왔던 때가 그저께 일인 것처럼 생각이 났다.


사무실에서 직접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들자 그분은 다짜고짜 


“내일부터 내 방에 와서 근무해.” 

“식구들과 의논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본인이 판단할 일이지 무슨 놈의 의논이 필요해.”

“내일 전화 올리겠습니다.”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분 특유의 화법으로 자기소개나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서울로 갈 것인지를 집에 가서 의논해 보고 다음 날 전화 드리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명령이므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본부나 서울에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직원들이 비서관이 되기를 희망했음에도 5급 비서관 자리에 파격적으로 지방에서만 근무한 7급인 나에게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댐빵 강의


그분과 인연은 비상을지연습 훈련 준비과정에서다. 나는 7급 직원으로서 기획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과장(서기관)이 직접 청장을 비롯한 산하 기관장을 모시고 직원들에게 전시업무 처리에 대한 교육을 했다. 그 자료는 실무자인 내가 만들었다. 그날 교육을 하려고 강단에 올라선 과장이 인사말만 한 후, 마치 사전에 계획이나 된 것처럼 


“오늘 교육은 양해해 주신다면 담당자가 직접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고는 단상을 내려가 버렸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 나에게 집중되었다. 교육 직전까지도 나에게 교육하라는 지시나 협의가 없었다. 더구나 청장이나 산하 기관장들에게 실무자가 직접 보고하거나 교육한 사례가 그때까지는 있지도 않았다.      


생애 첫 강의   

  

 느닷없이 강의를 하라는 지명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단상에 겨우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많은 사람 앞에 서 본 일이 없었다. 정신없이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수백 개의 눈망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걱정스럽게 바라보거나 망신당할 것을 예상하면서 재미있어하는 표정도 섞여 있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피할 방법은 없었다. 

     

오기  

    

 내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강사에게 교육을 받으려 온 사람에 불과하다. 자료를 직접 작성한 내가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을 다잡았다. 애써 다리와 배에 힘을 잔뜩 주면서 일부러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금 많은 사람 앞에 서 봅니다. 교육을 받기만 했지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미리 예상하지 못하여 부족함이 많겠지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첫마디를 더듬거리면서 시작했다. 


 그 후 두 시간 가까이 쉬지도 않고 나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오히려 즐기면서 눈인사도 나누고 농담도 해 가면서 큰 실수 없이 계획된 시간에 교육을 마쳤다. 청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인사를 하고 단상에서 내려갈 때까지 박수를 쳐 주었다.      


좋은 인연

    

 교육이 끝난 후 바로 과장이 불러서 갔더니 당신께서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그렇게 했는데 자기보다 훨씬 잘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청장이 부속실에 근무토록 지시하였으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비서 업무를 할 자질이 못되니 현재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그래서 타협안으로 기획업무를 계속하면서 근무 장소만 청장실로 옮겼다. 10개월 동안 그분을 모시고 일했다. 그 후 그분은 다른 자리로 영전하셨다가 3년 후 정부 인사에서 차관으로 발탁되셨다. 


 그날 이후 나는 자신감이 생겨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강의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또, 세월이 흘러 간부가 되었을 때도 언론 인터뷰 등 생방송이나 각종 행사 때 수천 명의 청중 앞에서도 두려운 없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살이    

 

 공무원은 그때나 지금이나 박봉이었다. 처와 어린 딸과 갓난 아들, 네 식구가 농사짓는 처가에서 식량 도움을 받아가면서 대구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서울에 가서 생활할 자신이 없어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나를 인정해 주고 배려해 주신 뜻에 따르기로 했다. 


 전화받은 다음 날, 새벽 기차를 타고 여의도 본부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당장 숙식할 곳이 없어 대구에서 파견 온 직원의 하숙집 문간방에 서로 등을 맞대고 칼잠을 자면서 지냈다.   

   

 더부살이 한 달 만에, 버스 종점 근처 변두리에 반지하 단칸방을 얻어 가족이 다 올라왔다. 같은 번지 내에서 연립주택과 다가구주택으로 옮겨 다녔다. 남들은 강남으로 신도시로 다들 떠났지만, 아이들이 유치원부터 대학 졸업하고 결혼해서 분가 후까지 36년간을 한 번지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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