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승용차 앞 좌석에 타고 대구를 다녀왔다. 오가면서 한 군데를 찾아보려 애썼지만 헛일이었다. 그때 왕복 2차선이었던 고속도로가 이제는 왕복 8차선에 지하도로까지 생겨 어디쯤인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날도 관용차 앞자리에 타고 있었다. 안동으로 출장을 갔다가 퇴근시간 무렵에 대구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구마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비가 세차게 내려 시야가 흐릿해졌다. 차가 약간 오르막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때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 오던 대형트럭이 느닷없이 중앙선을 넘어와 우리 차가 달리던 차선 전부를 가로막고 지그재그로 미끄러지면서 내려왔다. 도로 바깥은 낭떠러지여서 뛰쳐나가거나 급정거한다 해도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집채만 한 대형트럭을 보는 순간 ‘와!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뒤를 돌아보면서 “꽉 잡아요!”라고 크게 소리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바로 “꽝!”하고 충돌하여 차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차는 온통 찌그려졌고 문이 떨어져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뒷 자석에 앉았던 분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운전기사도 몇 군데 핏자국이 보였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피투성이가 된 그분을 둘러업고 고속도로 옆 비탈길로 겨우 내려가 시내 쪽으로 무작정 뛰었다. 한참 가다 보니 눈앞에 병원 간판이 보였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에 희미한 형광등만 덩그러니 보였다.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고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온돌방 병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함께 입원한 두 사람이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어제 바로 시내 큰 병원으로 옮겨갔고 의식을 찾지 못한 나만 이 병원에 남아 있다고 했다. 나 혼자만 살았다는 말로 잘 못 알아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곧 의사가 병실로 왔다. 내가 어제 병원 앞에서 의식을 잃고 쓸러 졌다가 10시간 만에 깨어났다고 했다. 다음 날, 나도 큰 병원으로 옮겨갔다.
하루가 지난 후, 경찰관이 교통사고 피해를 조사하려 병실에 왔다. 사고를 낸 차량은 포항 제철단지에서 철강코일을 운반하는 대형특수 차량이었다. 그 차는 브레이크가 앞과 뒤에 있는데 앞 쪽이 파열되어 뒤에서 밀려오는 힘에 정차하지 못하고 중앙선을 넘어와 충돌 순간에 기적적으로 정지되었다고 했다.
만약 순간이라도 늦게 정지되었다면 관용차는 큰 차 밑에 깔려 형체도 알아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요행이 그 차 큰 타이어와 충돌하여 튕겨 나오지 않았다면, 모두가 큰 일 날뻔했다고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진단 결과 나는 8주이고, 내가 업고 왔던 그분은 타박상으로 2주, 운전기사는 찰과상으로 1주 진단이 나왔다. 운전기사는 충돌을 예견하고 본능적으로 자기 쪽으로 핸들을 돌려 내가 앉은 쪽과 충돌했고 그분은 내 뒷좌석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적게 다쳤다.
사고 소식이 본부는 물론 전국 지방기관에 빠르게 전해졌다. 사고내용보다도 ‘8주 진단받은 직원이 2주 진단받은 높은 사람을 업고 병원까지 뛰어간 것’이 관심과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렸다. 나는 졸지에 ‘책임감이 아주 강한 직원’으로, 반대로 그분은 ‘엄살이 아주 심한 분’으로 과장된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분은 난처했고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운전기사와 함께 완치되지 않았는데 사흘 만에 퇴원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나만 병원에 남아 있게 되었다.
입원하고 있는 동안 육체적인 고통도 심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그분을 업고 뛰었다’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어쩌다가 그분의 체면을 손상시킨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그분은 앞 당겨 퇴원까지 했지만, 소문 때문에 많이 불편해한다는 소식을 문병 온 동료로부터 들었다. 내가 무엇을 잘 못 해서 그분을 불편하게 했을까.
만약에 같이 출장 간 젊은 직원이 사고로 피투성이가 된 분을 못 본 체 그냥 두고 혼자만 병원으로 달려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의리 없는 무책임한 직원‘으로 비난했을 것이다.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지 않았겠는가.
나도 계속 입원해 있기가 찜찜해서 겨우 몸이 움직여지는 6주 만에 퇴원하고 통원치료를 받았다. 부축을 받고 사무실에 나가 그분에게 사죄 아닌 사죄를 했다. 말로는 “당신이 죄송할 일이 뭐 있는가?”라고 했지만, 불편해하는 심기는 여전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법에 따라 당연히 청구할 수 있는'공무상 요양 신청'도 포기했다. 더 이상 소문을 잠재울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후 반년이 지나, 사람들의 관심에 멀어지자 그분과의 관계도 차차 나아졌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시간이 흐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필이면 그날 내가 왜 그 관용차를 타게 되었을까. 그때까지는 그런 분 수행은 간부급 직원이 했지 나처럼 일반 직원이 한 사례가 없었다.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고 동료들도 부러워했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여 죽을 뻔했다. 그 와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잘 못 한 것도 없으면서 그분을 난처하게 한 장본인으로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책임감이 강한 직원’으로 과대 포장 되어 좋은 평판을 받게 되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를 글이 아닌 몸으로 체험했다.
* 당시는 119 긴급 구호 서비스 제도가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