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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원 Sep 28. 2023

나는 모른다

시험 답안

   

민망함  

   

그날이 오지 않기를 빌었지만, 기적은 없었다.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하루쯤 휴가라도 낼까 하다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출근은 했다. 오후가 되자 곧 닥칠 민망스러운 상황을 잠시나마 모면해 보려고 사무실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두세 편을 동시상영 하는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공중전화를 찾았다.


 달포 전에 시험을 봤다. 문제가 요구하는 답을 쓰지 못해서 애초부터 합격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발표일이 가까워지니까 자꾸만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근무한 지 이십 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맞이한 소중한 기회였다. 합격하지 못하면 시간을 배려해 준 상사나 동료 직원들과 가족들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다.      


승진 시험


 행정고시가 아닌 방법으로 공무원을 시작한 사람은 사무관 승진 시험이 큰 분수령이었다. 1차 객관식 자격시험을 거쳐 2차 논술 시험에서 고득점순으로 합격자를 결정한다. 합격하지 못하면 퇴직하는 날까지 승진은 없다. 시험자격이 되면 대개 준비를 한다고 공무원 고시학원이나 독서실에 들락거렸다. 


 시험 일자가 정해지면 준비에 전념하기 위해서 휴가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담당업무는 상사나 동료 직원들이 대신했지만, 공백이 없지는 않았다. 논술 시험은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응시자에게 부담이 너무 크다 하여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다음 해에부터 객관식으로 바뀌었다가 몇 년 지난 후에는 승진 시험 제도가 아예 폐지되었다.    

  

준비 부족

 

 나는 시험 준비할 시기에 전국으로 출장 다니는 업무를 담당했다. 고시학원은커녕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날도 많지 않았다. 객관식 준비는 주로 이동하는 차 안이나 여관에서 문제 풀이 위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자격시험은 무난하게 통과했다.


 관건은 논술 시험이었다. 여간한 속필이 아니고선 주어진 시간에 괘지 20쪽 분량의 답안지에 국한문 혼용으로 다 메꾸기가 어려웠다. 가방끈이 짧은 나는 이런 유형의 시험이 생전 처음이어서 부담이 더 컸다. 시험을 얼마간 앞두고서는 하루에 볼펜 한 자루의 잉크가 다 마를 때까지 연습에 골몰하기도 했다.    

   

나는 모른다

   

 한 과목에서 낭패가 났다. 배점 50점으로 합격을 가름할 큰 문제가 ['K'와 'S' 제도를 제시한 후, 각 제도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을 쓰라]라는 것이었다. 그중 'K'제도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제도라 개념조차 몰랐다. 그 문제에 답을 쓰지 못하면 과락(科落)이 되어 불합격이다. 설사 다른 과목에서 고득점을 한다 해도 별 의미가 없다. 시험을 포기하고 고시장에서 퇴장할까 하다가 연습 삼아 아는 문제 답이라도 써보기로 했다.  


 25점씩 배점되는 다른 두 문제의 답을 먼저 쓴 후, 큰 문제 답안지 첫머리에 대뜸 ‘K 제도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S' 제도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겠다.'라고 적었다.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규정에 없거나 알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히는 때가 이따금 있었다. 그때마다 손을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답안지에 솔직히 ‘나는 모른다’라고 쓰고 나니, 긴장감이 확 사라졌다. 연습할 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답을 쓸 수 있었다. 점수를 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지만, 평가하는 교수에게 오만으로 비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평가


 전화를 받은 직원 목소리가 뜻밖에 밝았다. 다짜고짜 “빨리 들어와! 얼마나 찾았다고….”하고는 뚝 끊어 버렸다. 합격했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했다. 믿기지 않아 한여름 뙤약볕에 달구어진 광장을 뛰다시피 가로질러 사무실로 달려갔다. 


 시험의 공정성을 확보하려고 제도상 출제하는 교수와 평가하는 교수가 서로 달랐다. 답안지에 ‘나는 모른다.’라고 썼던 문제는 지방에 있는 어느 한 대학을 제외하고는 서울이나 다른 대학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 제도였다. 나뿐만 아니라 그 제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답을 썼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잘 모르면서 아는 체한 답은 감점되었고, 모른다고 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만 했다. 아니면 문제의 답을 반만 했으니 점수도 반을 기준으로 채점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궁금했지만, 평가 교수가 누구였는지는 공개되지 않아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모른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포기하지 않고 답을 섰다고 평가해 준 것으로 그냥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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