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목에 방울
갈라파고스 신드롬(galapagos sydrome)을 가장 심하게 앓고 있는 곳은 바로 국회일 것이다. 내가 국회에 드나들었던 30년 전 보다도 나아진 것이 없는 유일한 곳이 아닌가 싶다. 비합리적인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국가 재정이 소요되는 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면서 국민 부담을 고려해야 된다는 공무원에게 오히려 나라 걱정을 왜 선출직이 아닌 당신들이 하느냐면서 면박을 줄 때는 기가 찼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는 법까지 만들겠다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나는 그때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관이었다. 당시 여당에서 ‘6·25 전쟁에 참전했던 학생만 국가유공자로 한다는 법률 개정안'을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직접 제안하여 회기 내에 처리하겠다고 알려왔다.
긴급 정책회의를 열어 ‘학생이 아닌 다른 신분으로 참전했던 분들과 형평이 맞지 않아 수용할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법 개정을 저지할 수단이 위원장을 설득하는 방법뿐이었다. 실패하면 보훈체계가 붕괴될 것은 뻔했다.
위원장은 당시 정권의 실세 중에 실세였다. 장. 차관은 물론 간부들도 대놓고 반대하거나 설득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 그는 당시 최고의 달변가로서 누구에게 설득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위원장을 설득하는 임무를 장관이 차관에게, 차관은 담당 국장에게, 국장은 담당과장에게 계속 아래로 위임되었다. 과장은 그 임무를 실무자인 나에게 하라고 했다. 이 임무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고,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낮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국회 본관에 있는 위원장실을 찾아갔다. 비서실장에게 공무원증을 내 보이고 찾아간 용무를 말했다. 사무관이 장관급보다도 서열이 높은 위원장과 면담 요구는 격에 맞지 않다고 문전박대를 했다. 비서실장의 직급이 나보다 두 단계나 높은 부이사관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었다. 나도 비서실장에게 주눅 들지 않고 방문 목적을 말했다.
“이 문제는 실무자인 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위원장님에게 보고 드리게 해 주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컸던 모양이다. 밖이 시끄러우니까 위원장이 문을 열고 말했다.
“누가 오셨는가?”
비서실장이 상황을 보고하니 위원장은 나를 훑어보더니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소파에 앉아마자 법 개정의 필요성과 추진 경위까지 단숨에 말했다.
“우리당 총재인 대통령 각하와 차기 대선 후보인 당 대표는 물론 주요 핵심기관장들과도 이 법을 개정하기로 이미 협의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집권 당에서 결정한 사항이고, 위원장인 내가 직접 제안하는 법안인데 당신들이 반대해도 쓸데없는 일이다. 돌아가서 그렇게 보고하고 법을 시행할 준비나 하세요.”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6.25 참전용사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시겠다는 위원장님의 큰 뜻에 공감합니다. 제가 법 개정을 반대하거나 설득하려 온 것은 아닙니다."
위원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럼 왜 날 찾아와서요? 실무자가..."
"저는 실무자로서 한 가지만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번 회기 중에 위원장님께서 법 개정을 직접 추진하신다면, 나라를 지켜내신 참전용사를 입대 전 신분으로 구분하지 마시고 모두 포함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150만 참전용사와 그 유가족 700만 명은 물론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는 돼야 위원장님의 명성과 위상에 걸맞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쪼잔하게 놀지 마시라는 말을 거꾸로 했다. 위원장은 당황해하면서
“그렇게 하려면 예산은 얼마나 더 있어야 되나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현재 예산 규모의 10배이고, 금액은 4조 원 정도로 추산됩니다.”
정치꾼 구미에 당기게 유권자 700만 명은 다소 과장했다. 또, 보상금을 다 드린다는 가정하에 예산을 추산했다. 한 마디로 비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보다 법 개정을 했다가는 제외되는 참전용사가 훨씬 많아 선거에서 불리하다는 것을 두뇌회전이 특출하다는 위원장이 모를 리 없었다.
“당장 그렇게 하기는 어렵겠네요?”
라고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틈이 보였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거들었다.
“참전하셨다가 부상을 당하였거나 무공훈장을 받은 분들은 이미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있습니다. 지금 법을 개정하여 참전자 중 입대하기 전에 학생이었던 분만 예우하려면, 농부 등 다른 신분으로 참전했던 분들을 설득할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들보다 학생으로 참전하신 분들이 국가에 더 공헌했다는 자료를 저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위원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나 되나? 대안을 말해 봐요! 대안!”
“예,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참전하신 모든 분을 통 크게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방안입니다. 예산이 많이 소요됩니다. 다른 하나는 참전자 중 학생들의 공헌이 농민 등 다른 분들보다도 많았다는 자료나 논리를 찾아내는 방법입니다. 관련 전문가나 연구기관의 용역과 시간 등이 필요합니다.
추진할 명분도 없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아 방법이 없다는 말을 에둘러서 했다. 아무튼 회기 중 법 개정은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2002년도에 참전하신 분 모두를 '참전유공자'로 예우하다가 2011년에 '국가유공자'로 예우해 드리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면서 국가의 장래나 국민의 삶의 질보다 정치적 목적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내가 처음 국회에 다닐 때보다는 온 세상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변했다. 그러나 가끔 뉴스를 보면 국회만이 아직도 세상과 단절된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