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령을 찾아서
인사 명령을 받고 첫 출근을 했다. 때 아닌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종일 장대비가 내리고, 천둥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현충탑에 참배했다.
그날 저녁 신고식 겸 환영회 자리에서 어느 팀장이 말했다. "원장님 관사는 공동묘지를 옮기고 지어서 그런지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밤에는 가끔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소문도 있고, 낙뢰 지점이어서 정전도 자주 일어난다."라고 하면서 넌지시 겁을 주었다. 내가 책임자로서 지녀야 할 자질이 있는지 가늠해 보려는 꿍꿍이셈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도 안 했지만, 속으로는 기분이 찜찜하고 불안했다.
내가 사용할 관사는 묘지 바로 옆 숲 속에 홀로 있는 큰 주택이었다. 비가 내리는 첫째 날 밤, 낯선 방에 혼자 누워 있자니 잠은 오지 않고 온갖 잡념과 공상에 빠져들었다. 이곳에는 정말 영령이 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내가 만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뜬금없이 먼저 영령을 찾아가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튿날 낮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영령이 나타날 만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어둠이 내려앉으면 그런 곳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영령을 만나려고 밤에 다시 관사에서 나왔다.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나올 때 마음을 단단히 먹었건만, 막상 어두운 묘역으로 들어서니 겁부터 덜컹 났다. ‘두렵지 않아! 겁낼 것 없어!’라고 되뇌면서, 그런 생각을 떨쳐 내려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겁 없이 묘역으로 나온 것이 후회되어 되돌아갈까 망설일 때였다. 그때 묘역에서 갑자기 웬 불빛이 나타나더니 묘비에서 묘비로 휘젓고 다니다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듯했다. 머리털이 주뼛 서면서 등골이 오싹했다. 빨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몇 발짝 가면 불빛도 나를 따라오는 듯했다. 순간 ‘저 불빛이 내가 만나려고 했던 영령일 수도 있는데 도망쳐서는 안 되지!’라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두렵고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우 악으로 버티면서 움직이는 불빛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불빛도 그다지 신비스럽지 않고, 다소 인공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묘역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도로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다. 그것이 오석(烏石)으로 된 묘비의 매끄러운 표면에 반사되면서 마치 불빛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겁에 질려 허둥대는 내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명색이 이곳 책임자라면서 고작 묘비에 반사된 불빛에 놀라 도망치고자 했던 꼴이 부끄러워서 그곳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거기서 포기하고 그냥 돌아간다면, 앞으로 두려움 때문에 이곳에서 근무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이참에 담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특유의 오기가 치밀어 그날 밤에 묘역 전체를 다 돌아보기로 했다.
다시 걸으면서도 두려운 마음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없애려고 애써 다른 생각을 하다가 전날에 본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두려움이란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가 두렵다고 하면 두려운 것이 되고, 두렵지 않다고 하면 두렵지 않은 것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 묘역에서는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묘비에 비치면 반사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내 마음이 왠지 묘지에서는 밤에 괴기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상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날 밤, 이십 리에 가까운 묘역 길을 끝까지 걸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영령은 만나지 못했다. 아니 영령은 애초부터 내가 감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길을 다 걷고 나니 웬만한 두려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전날 밤에는 그토록 썰렁했던 관사가 내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져 단잠을 잤다.
나는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하는 그 길을 걸으면서 내 마음의 크기를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내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비석에 반사된 불빛을 보고 겁에 질려 허둥거릴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일까. 아니면 캄캄한 밤중에 묘역 길을 끝까지 걸을 정도로 대담한 것일까. 본디부터 마음이란 크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는 것일까.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지금도 가끔 내 마음의 크기를 돌아보고 싶을 때면 그 길을 다시 걸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