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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ke green Jul 13. 2021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잖아 (1)

느린 걸음이라도 한걸음씩



그래서 그건 돈이 좀 되나?

엄마가 물었다. 내 그림으로 무언가 의뢰받아 작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 이야기를 꺼냈는데 돈이 되냐는 질문에서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뭐 그냥 그리 큰돈이 되는 건 아닌데 재밌게 하고 있어... 다음 의뢰도 받아놓은 상태고 또 다행히 다른 건으로 미팅도 하나 잡혔어.”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졌던 이유는 엄마를 더 이상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돈도 되지 않는 것을 “일”이라 자랑한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내 기분이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엄마~나 선생님한테 칭찬받았어.’ 했던 아이 때와 똑같다. 이 얘기가 나오기 바로 직전, “본업에 충실할게”라는 내 말에 “본업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버는지 지켜볼게”라고 한바탕 걱정 섞인 엄마의 응원(?)을 들었던 터라 조금 나는 한층 더 작아졌다.


돈은  버나?”라는 말이 “재밌나?”  일맥상통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서 재밌게 일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오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 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런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더없이 즐겁고 행복하다가 순간  얘기에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린 나처럼…


 마음이 부자라는 동화같은 표현을 벗어나면 현실은 부족한 것이 많다. 엄마가 생각하는 보통의 기준에 훨씬 못미친다. 친구들이 가정을 이루고 집을 장만하는 사이에도 여전히 혼자이고 비슷한 규모의 집으로 2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니고 있다. 그렇다고 딱히 부족함을 느꼈다거나, 갖고 싶은 (작은 )들을  가져 서러웠던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나를 해결해야 할 숙제로 여기는 엄마는  통장잔고를,  욕심이 없다는 나의 불완전을 언제나 걱정한다.


저 이 회사 나갈게요.

 남들이 소위 말하는 멀쩡한 회사 6  동안 다녔었다. 그리고 점점 가성비 인간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무렵 바탕화면에 사직서를 내려받고  시간에 걸쳐  번이나 고쳐  사직서를 제출하며 퇴사했었다. 나의 가치를 찾고 싶어서 


 한 상사는 어딜가면 이만큼의 대우를 받으며 다닐 수 있겠냐고,  월요일이 되면  선택을 번복하게  거라 코웃음을 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나는  사람처럼  곳을 평생직장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앞뒤 생각하기에는 지쳐 있었다.


 퇴사하던  마지막 업무를 마치고 도착한 한우집에서 회사 이름 아래 마지막으로 먹는 비싼 고기를 신나게 입으로 털어 넣고 있던 나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는 사장님의 인사와 함께 숟가락 마이크가 넘어왔다.

‘아차, 그냥 회식 아니고 내 송별회지 참~’

고기에 술을 꿀꺽 삼키고 마이크를 잡았다.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일들, 슬프고 좌절하는 일들이 죄다 여기에 있었습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태어나 가장 열심히 살아본  같아요. 최선을 다해서 일했고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아요. 그래서 이곳이 그립지 않을  같습니다. 저는 지금보다  많이 행복해질 거니까요

당혹스러워하는 윗분들의 박수들이 나왔다. 그 말은 준비된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냥 ‘감사했다 많이 그리울 거다(눈물 찔끔)’ 이런 훈훈한 마무리도 괜찮았겠지만 그 답사는 더 나은 내가 되어가겠다는 각오이자 다짐이었던 거다.


  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가장 행복했고 가장 불행했다. 웹디자이너로 입사해 이미지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했었다. 6 반의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는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어느 것도 전문적이지는 않은,  그곳에서만 쓸모 있는 가성비 인간으로의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다 알지 않아도 될 뒷얘기를 알게 되었 존재에 회의감이  퇴사를 결정했던 것이다. 이 곳에서 그럭저럭 버티는 삶을 살고싶지 않다라는 생각.


 조금  버텼더라면 지금보다   규모의 집으로 이사를 가고 더 큰 냉장고와 건조기,  좋은 차를 샀을지도 모를 일이다.(그냥 지금 갖고 싶은 것들의 나열) 반대로 집도 넓히고 차도    핑계로  버티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조금 버텼더라도 이미 나가야만  이유를 수십 가지나 만들어둔 내가 그곳을 얼마나 버틸  있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No!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그러니까 일단은 실패다
이 이야기가 어느 성공한 이의 전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싸한 해피엔딩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퇴사를 후회한 적이 없다. 후회라는 말을 입에 담기엔 퇴사 후 백수생활이 너무 신났다. 가고 싶었던 장기여행, 동경했던 등반여행, 운동, 그리고 싶은 그림, 해보고 싶던 일들을 꽤나 많이 했다.


 행복했던 통장 파먹기의 추억이여~가산탕진의 길은 결코 멀지 않다. 생각 없이 즐거웠던 대가로 넉넉했던 통장잔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누가 내 퇴직금을 다 썼지??


 다시 비슷한 회사에 들어가 똑같은 스트레스와 싸울 자신이 없으니 내가 가진 재주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궁리를 했고 시작한 것이 개인 맞춤형 굿즈를 만드는 일이었다. ‘추억을 담아드립니다.’ 라는 타이틀로 컵이며 열쇠고리나 마그넷을 만들었다. 별도의 주문을 받아 드로잉을 하고 액자를 만들기도 했다. 다행히 아이디**라던지 하는 사이트가 뜨고 수공예 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였고 조금씩 주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는 당시 제작했던 상품 중 일부이다


아... 이 이야기가 성공한 이의 화려한 전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것은 어느 실패자이거나, 아직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리고 있는 꿈만 많은 사람의 이런저런 변명과 넋두리일 뿐이다.


 그때 나는 왠지 나를 드러내는 일이 부끄러워 시작한 일을 주변에 크게 알리지도 못했다. 처음엔 밤을 새도 재밌게 그림을 그렸지만  나가떨어졌다.  인건비와 제작 시간을 간과한 낮은 가격이 우선 문제였다. 그렇다고 낮은 가격에 맞춰 그림의 퀄리티를 낮출 수도 없었다.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작업시간은 늘어갔지만 하루에 내가 그리고 구워낼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일시정지.

퍼스널한 아이템은 단가를 조정하고, 접근성이 좋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아이템들을 개발해야겠다 라는 판단 후 스토어를 닫고 그 이후 아직까지 재오픈을 못했다. 내 첫 시도는 그렇게 아직 멈춤 상태다.


무작정 시작한 일이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그에 맞춰 또 다른 대안을 찾아가야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이 겹치면서 나는 아주 오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기까지도 몇 개월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이야기가 길어져…2부에 계속)


https://brunch.co.kr/@yongby/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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