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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책방 #2] 어쩌다 한국인

#2 <어쩌다 한국인> (허태균, 중앙북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심리학(psychology)은 외래 학문이다. 유럽에서 시작됐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레그마티즘(pragmatism)을 만나 급격한 성장을 이뤄 온 학문이다. 광복 직후 ‘조선심리학회’가 만들어졌지만 수십 년간, 심리학계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의 심리학자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유럽과 미국의 심리학자들의 말과 저술들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리고 열심히 그것을 퍼다 나르기 바빴다.     


  당시 미국 사회를 지배하던 것은 행동주의(behaviorism) 심리학자들이었다. 심리학은 철학으로부터 출발한 학문이지만 자연 과학적 방법론을 토대로 그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그 대전제에 가장 심취한 사람들이었기에 빛깔도, 형태도, 맛도, 감촉도 없는 ‘마음’이라고 하는 불확실한 요소는 심리학 연구에서 원천 배제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펴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유럽과 미국,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던 심리학계에 심상치 않은 지각 변동이 감지되고 있었다. 특히 행동주의 심리학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고아원 등으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도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른바 행동주의 심리학에 입각한 ‘엄격한 육아법’의 득세로 인해, 당시 영아사망률이 극단적으로 치솟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행동주의 심리학 이론들은 소위 ‘블랙박스 이론’이라는 오명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유기체에 가해지는 자극(S)과, 자극에 따른 반응(R)만을 유심히 보느라 정작 자극이 반응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그 중간 과정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 요지였다. S-( ? )-R. 심리학계의 관심사가 그 중간 과정을 채우는 것, 즉 ‘마음 연구’로 넘어가기 시작하고 급기야 인지 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는 거대한 변혁이 발생하자 자연스럽게 행동주의 심리학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때, 굳건하던 주류 심리학이 흔들리던 그 순간은 곧 변방의 심리학자들에게 있어 또 다른, 새로운 기회의 서막이었다. 패러다임이 변화하던 그 순간은 곧 ‘서구’ 심리학이라는 근원적인 편향성이 비로소 살짝, 그 한계를 내보이는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단선적 진화의 허구성, 문화상대주의, 인류학적 접근, 심리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앞으로 이 문제를 맡을 새로운 심리학 분야들이 본격적으로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비교문화심리학(cross-cultural psychology), 문화심리학(cultural psychology), 토착심리학(indigenous psychology) 등 서구 심리학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심리학 이론의 진정한 보편 타당성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국 심리학자들의 대응은 기민했다. 기존 주류 심리학에 대한 맹목적 집착은 곧 비판적 수용으로 변모되었고 ‘한국만의 심리학을 하자’는 생각은 곧 ‘한국인 심리학’, ‘유교심리학’, ‘동양심리학’ 등 새로운 심리학 연구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화병’, ‘한(恨)’, ‘체면’, ‘삐침’, ‘억울’, ‘신명’ 등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를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개념들이 도입되었고, 20세기 동안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심리학계를 이끌어 온 선구적인 학자들의 노력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꾸준하게 한국인을 겨냥한 심리학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문화심리학 연구실은 국내 거의 유일의 문화심리학 연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다 한국인>의 저자 허태균 교수는 문화심리학 분야의 질적/양적 팽창을 위해 지난 수십 년 간 아낌없이 헌신해 온 한성열 교수의 바통을 이어받아, 비교적 최근부터 실질적인 문화심리학 연구실의 장(長) 역할을 맡게 된 사람이다. <어쩌다 한국인>에 소개된, 한국인의 심리 특성을 설명하는 여섯 가지 개념인 ‘주체성’, ‘가족확장성’, ‘관계주의’, ‘심정중심주의’, ‘불확실성 회피’는 앞으로 국내 문화심리학계를 이끌어갈 허태균 교수가 처음으로 세상에 다듬어 내어 놓은 한국인 연구의 핵심 키워드들이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간 사회인지(social cognition) 분야의 영향력 있는 학자로 잘 알려져 있던 허태균 교수의, 문화심리학자로서의 본격적인 첫 행보가 바로 <어쩌다 한국인>이라는 책이다. 그는 저서 집필과 강연 활동을 통해 대중과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 서구 심리학과 동양의 심리학을 넘나들며 때로는 유쾌함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그는 한편 앞으로 국내 문화심리학계를 이끌어 갈 선두주자로서, 문화심리학에 대한 다양한 학술적 연구 노력에도 연일 매진하고 있다.     


  한국인이 궁금하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른 한국인만의 독특한 심리들이 궁금하다면 정답은 문화심리학이다.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할 것이라면, ‘한국인’과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어 살아갈 것이라면, 가장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 가운데에서도 단연 ‘한국인 심리학’이다. 선구적인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기틀을 닦은 문화심리학은 이제 제2막으로 돌입한다. <어쩌다 한국인>을 통해, 앞으로 더 넓게 펼쳐질 문화심리학의 놀라운 도약을 미리 만나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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