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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장 진실한 순간

페르소나(Persona)에 대해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페르소나(Persona)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어지럽게 요동치는 각종 금기(Taboo)들과 판타지, 내밀한 욕구들을 감추려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위기의식은 페르소나, 즉 두 번째의 자아상의 뒤편으로 그 자신의 흔적을 숨겼습니다. 마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라도 하는 양, 부모/자식으로서의 삶, 교사/학생으로서의 삶, 상사/직원으로서의 삶 등을 사는 두 번째 자아가 의식할 수 없는 곳에 웅크린 뒤,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거짓말이 되었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가벼운 형식적 미소가 되었든 페르소나 이면의 내적 자아의 욕구를 감추려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우리에게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합니다. 즉 온전한 나 자신으로만 홀로 존재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사회적 상황에 놓인 인간은 두 번째 자아의 유지와 작동을 위한 심적 에너지를 계속해서 소모시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적극적으로 거짓 웃음을 띄우거나 상사에게 아부하는 등, 적극적으로 페르소나를 발현시키는 상황에서만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반드시 타인과의 접촉이 전제되지 않더라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존재를 단지 내 마음속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적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가면 위에 또 다른 가면. '두 번'이나 감춰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사회'를 향해 있는 인간의 본능이란 상당히 강력한 것이어서, 나 이외의 그 누군가의 존재는 항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간섭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다수의 심리학 연구들은 동조(Conformity), 책임감 분산(Diffusion of responsibility), 인상 관리 전략(Impression management strategies) 등 타인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만 성립할 것이라 기대되었던 많은 '사회적' 현상이, 단지 그것과 관련된 상황을 혼자 '상상'하는 과정만으로도 동일한 효과를 유발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혼자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진정으로 '혼자' 존재할 수는 없을 겁니다. TV,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든, 꿈을 꾸든 우리는 항상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흔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라던 자크 라캉의 말은, 개인 간 욕구의 경계가 분명치 않기에 항시 개인의 영역과 타인, 사회의 영역은 중첩될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페르소나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전제하는 상황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감안해볼 때, 우리가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페르소나)라는 이중적인 자아 구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인문학 정신, 즉 인간에 대한 이해란 이처럼 강력한 '페르소나의 장벽'을 뚫기 위한 여정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인간 군상 뒤에 도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글을 쓰는 이들은 문학으로, 철학을 다루는 이들은 그 자신의 치열한 사색으로, 역사학자들은 그간 인간이 남겨 왔던 무수한 흔적들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심리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심리학의 초기 역사를 수놓은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나 충동, 다양한 층위의 자아 역동 등을 다루었던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이었으니 말이죠. 리비도(Libido), 집단무의식, 열등감 등 '인간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끊이질 않았습니다.


  한편 학문의 세계 외부에서도,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려는 자본가들과 자신의 내밀한 욕구들을 방어하려는 대중들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졌습니다. 자본가들은 '고객들의 니즈(needs)를 파악해야 이익 추구가 가능하다'며 대중들의 가면을 흔들어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욕구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기업들의  시장분석, 제품에 관한 설문 조사, 소비자와의 인터뷰 등은 곧 대중들이 감추고 있는 진정한 '욕망'을 가려내기 위한 노력들인 셈이었죠. 하지만 무의식적인 욕망들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중들을 상대하는 자본가들의 노력은 종종 허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중들은 예민하고 깐깐했으며, '다른' 욕망을 연기함에 능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은 그 언제나 타인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페르소나가 '해제'되는 순간, 즉 내면의 진정한 욕구가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죠. 그러나 문명화와 더불어 시나브로 찾아온 '감시 사회(Surveillance society)'로의 이행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흐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노트북 웹캠 해킹 방지 액세서리'의 등장(!)(사진 출처: http://steaglebrand.com/)   



  '페르소나의 저항'이 거세다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만 했습니다. 억지로 '무장해제' 시킬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그것을 행하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까요? '인간이 가장 진실해질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인가?', '다른 사람의 존재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져, 그래서 가장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은 언제인가?'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사람들의 본질을 엿보고 싶은 그 모든 이들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구글이나 네이버, 다음 등 주요 검색 포털들이 보유하고 있는 검색어 관련 데이터들은 기존 대중들의 의식 위에서 이루어졌던 여타 설문 조사들과는 그 본질 자체를 달리 하는, 의미심장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페르소나의 해제)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저항 없이 토해내는 순간, 그것이 곧 '검색어'를 입력하는 순간이었던 것이죠. 선거 후보자 당선 예측에서 그 어떤 설문조사보다 대형 포털 검색량 집계/추이가 더 높은 정확성을 보이는 것, 단순히 검색 빈도량으로만 검색어의 순위를 매기면 죄다 성(Sex)'에 관련된 검색어만 상위권에 오르는 통에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를 집계할 수밖에 없는 주요 검색 포털들의 사정 등은 대중들이 검색어를 입력하는 순간, 얼마나 '진실해지는지를' 방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구글만한 '심리학자'가 또 어디 있을까요

  


  이렇게 본다면 다소 서글픈 결론을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가장 안심해야 할 순간, 가장 타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그 자신으로 숨 쉴 수 있는 순간이 곧 우리가 가장 안심해서는 안 될 순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 심리마케팅, 무의식마케팅, 소비자 행동 설계 등 심리학과 마케팅을 결합시킨 최근의 현상들이나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의 맞춤 동영상 추천, 구글의 '맞춤 광고', 온갖 몰래카메라들의 범람 등을 보고 있자면 페르소나를 둘러싼 사람들 간의 줄다리기가 점차 위태로운 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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