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네 말도 맞고, 너의 말도 맞다"

문화와 인지부조화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론이 하나 있다. 맞다. 바로 인지부조화 이론(Cognitive dissonance Theory)이다. 매우 중요하고 또 일상에서 무척 빈번하지만 미처 깨닫고 있지 못했던 광범위한 현상에 '인지부조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놓은 것은 분명 페스팅거의 위대한 업적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막상 인지부조화 현상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것이 갖는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다.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앞다투어 인지부조화 현상에 관한 후속 연구들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으며, 어찌나 유명했던지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적어도 '인지부조화'라는 말을 한 번 이상 들어보고 또 일상에서 활용하고 있는 듯하니.


신념과 행동의 불일치


인지부조화 현상 발생의 기본 조건이다. 예를 들어 '도덕적으로 사는 삶'을 신념으로 가진 이가 있다 하자. 그는 자신의 신념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자 기왕이면 도덕적인 실천 행위를 지속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는 상태는 내적 불편감을 유발하지 않는 매우 안정적인 상태로. 즉, 그 상태로의 이행 자체가 곧 하나의 동기(motivation)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항상 우리가 가진 신념대로 살 수는 없다는 점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항상 행복한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카르페디엠이 인생의 신념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제약 때문에, 순간의 즐거움을 포기하며 살아야 할 때도 있다. 도덕적인 삶에 대한 신념 또한 마찬가지다. '무엇이 도덕인가?', '도덕을 추구하는 것이 정녕 옳은가?' 등 때로 신념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을 겪게 되는 것은 물론, 두 개 이상의 도덕이 혼재하여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심리학자 콜버그의 '하인츠 딜레마' 등 각종 도덕적 딜레마의 존재를 말한다.



가난한 이의, 사랑하는 이를 살리고자 결국 감행한 타인의 약 훔치기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인츠 딜레마가 묻는 물음이다.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즉시 복구 작업에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 불편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계속 불안하고, 찝찝하다. 장기화되면 내가 그간 굳게 믿어 온 신념이나 삶의 방향성에 대한 회의감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지부조화를 경험하는 개인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 앞에 서게 된다. 신념을 고치거나, 행동을 고치거나. 어쨌든 두 가지가 일치하는 방향으로.



낙장불입(落張不入)



  그러나 대개 인지부조화를 경험하는 시점은 '행동이 이미 저질러져 버린 후'다.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저질러버렸는데, 행동이라는 것은 한 번 저질러버리면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결과, 내적 불편감의 해소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단 하나만이 남는다. 바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신념을 고쳐버리는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행동과는 달리 신념이라는 것은 본디 추상적이다. 눈으로도 관찰되지 않으며 내가 이리저리 바꾼다 한들, 타인이 본질적으로 내 마음속에 간섭하여 그 사실을 알아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지부조화를 겪는 이들은 끝내 자신의 신념을 고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 도덕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거야'
'나는 여태껏 이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것'이 더 중요할지도 몰라'
'이런 상황에 처하면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거야.'
'과연 도덕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인지부조화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서구 문화권에 사는 아무개에게도 일어나고, 동양문화권에 사는 아무개에게도 일어난다. 신념과 행동을 맞추는 작업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행위다. 그러나 현상의 존재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작동하는 양상마저 똑같다고 할 수는 없다. 인지부조화 발생의 역치, 지속성, 맥락 등은 문화적인 요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종래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놓은 서구의 인지부조화 개념에, 타 문화권 심리학자들이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 이유다. 다시 말해, 인지부조화 현상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동양인과 서양인이 느끼는 인지부조화 현상의 모습이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인지부조화 경험에 관한 다양한 비교문화(cross-cultural) 연구들이 수행되었고, 많은 연구들이 동양인과 서양인의 인지부조화 경험 맥락은 다르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대개는,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에 비해 인지부조화 현상을 더 빈번하게,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이는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세상, 우주의 이치나 질서에 관해 생각하는 습관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견해다.



세상은 여러 분절된 단위들의 연합체인가?
아니면 분절된 단위의 합이 낳은 창발적 역동의 장인가?

우주는 일방향적인 흐름을 갖는가?
아니면 지속적으로 순환하는가?

개인(individual)이 질서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집단(group)이 질서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가령 심리학자 Peng과 Nisbett(1999)은 동양인들이 인지부조화를 덜 겪는 것은, 그들이 양면성, 조화, 모순 등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을 함께 묶어 사고하고 행위하는 것에 능통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일명 총체적 사고(Holistic Thinking)라고도 부른다. 반대말은 분석적 사고(Analytic Thinking)). 언어로 설명하자면 가령 애증, 미운 정 고운 정, 시원섭섭. 그리고 동양의 전통적인 '음양' 개념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세간에는 황희 정승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하루는 황희 정승 댁에 있는 두 하인이 다툼을 하였는데, 그중 한 하인이 황희 정승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 호소를 들은 황희 정승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옳구나." 다음으로는 다른 한 하인 또한 황희 정승을 찾아가 나름대로 또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황희 정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도 옳구나." 이 광경을 곁에서 보고 있던 부인(혹은 조카)이, 왜 두 사람 모두 맞다고 말씀하시는지 연유를 모르겠다는 말을 하자 이에 대해 황희 정승은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 "듣고 보니 당신의 말도 맞다."

  소위 '동양적 세계관'의 핵심적인 가치 중 하나는 바로 '고정적인 절대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기실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어도, 상황이 바뀌고 때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면 얼마든지 타당하지 않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맞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를 반대로 표현하면 본질적으로 틀린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세상 모든 요소와 이치들 중에는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제아무리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제각각의 쓰임이 있는 법이니.

  이에 익숙한 동양인들은 '인지부조화'를 덜 겪을 뿐만 아니라, 인지부조화 상태가 되었다 해도 이를 더 잘 견딜 수 있는 모양이다.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니. 한 번 틀린 것으로 보인다 한들 어찌 쉽게 그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맞는 때도 있으면 안 맞는 때도 있는 법. 혹은 안 맞는 때가 있다면 언젠가 맞는 때도 있을 터.

  물론 더 고민해봐야 할 부분은 많다. '동양인 대 서양인', '집단주의 대 개인주의' 구도는 (비교)문화심리학계에서는 점차 낡고 어설픈 구분법이 되어 가고 있다. 동양인이라 한들 그 안에 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다양한 문화들이 있다. 서양인 또한 마찬가지다. 구체적인 출신이 제각각이며 지역, 풍토, 주위 여건 등에 따라 사는 습관 또한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인지부조화에 대한 문화차 연구는 앞으로도 가야할 길이 멀다. 그리고, 앞으로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인지부조화 이론이 통용되지 않는, 외지인들에게는 새롭겠지만 현지인들에게는 본능적인, 그런 토착심리학적 발견이 이뤄질지. 앞으로 열정있는 (비교)문화심리학자들이 또 어떤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을지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이유다.



** 참고
- Kitayama, S., Snibbe, A. C., Markus, H. R., & Suzuki, T. (2004). Is there any “free” choice? Self and dissonance in two cultures. Psychological Science, 15(8), 527-533.
- Peng, K., & Nisbett, R. E. (1999). Culture, dialectics, and reasoning about contradiction. American Psychologist, 54(9), 741-754.

매거진의 이전글 '자존감' 찾아 나서는 중년 세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