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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의 부담을 줄이는 심리학적 방법

철천지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어려움에 관해

 최근 콜센터 상담노동자의 약 절반 가량이 자살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내용을 다룬 기사를 접했다(링크). 감정노동의 힘겨움을 여실히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일견 사람들은 생각한다. 전화걸고 전화받는 일이 사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일이라고. 대단한 스펙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기술적 숙련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닌, 솔직히 누구라도 기본 교육과 약간의 시행착오만 거친다면 해낼 수 있는 그런 일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작은 부정적인 말에도 쉽게 상처받는 여린 마음을 가진 나로서는, 아무리 자기계발하고 스펙 쌓아도 감당 못할 것 같은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직업이다. 솔직히 나는 콜센터 노동자 분들을 존경한다. 만약 내가 그들보다 조금 더 학교 다니고, 조금 더 '배웠다'고 가정해도 아마 달라지지 않을 감정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콜센터 상담노동자로 하여금 더 잘 견디게 만드는(보호요인), 혹은 더 못 견디게 만드는(위험요인) 요소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카테고리를 넓힌다면, 감정노동을 다루는 (심리학) 연구자들은 어떤 접근을 하고 있을까? 다음은 감정노동에 관한 국내외 심리학 논문 여러 편을 들춰 보며 얻어 낸 단서들이다.

사회적 지지
 다른 사람들의 조력을 말한다. 밥을 사주는 등 물질적인 지지와, 위로/격려를 해주거나 다른 감정(유머, 애정, 친밀감, 소속감)으로 스트레스를 잊게 해주는 정신적인 지지가 모두 포함된다. 사실 사회적 지지는 정신건강계의 만병통치약처럼 느껴진다. 힘이 되어주는 누군가의 존재는 웬만한 마음의 병에는 다 효험이 있다.

자율성(재량권, 통제감)
 자율성을 허락받은 이는 능동적인 대처를 할 수 있다. 말재주 등 개인기를 살려 위기 상황을 재치 있게 빠져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상사의 조력 구하기, 잡 크래프팅 등 가용한 여러 옵션을 동원하며 더 근본적인 대응책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자율성의 행사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환경요인의 뒷받침이다. 즉, 자율적인 행동을 허락/권장하는 회사에 있어야 한다.

조직-개인 부합, 과업중요성
 하루하루의 힘겨움을 버티게 만드는 '명분',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직-개인 부합은 조직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비전, 핵심가치, 이상 등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 얼마나 잘 일치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과업중요성은 내 과업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의 결과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가 맡은 이 일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얼마나 (버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만약 이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버텨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체력/정신력이 허용하는 한은…

정서이해
 정서를 잘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으로는 정서지능, 정서인식명확성 등의 개념이 있다. 정서이해가 잘 되는 사람은 일을 하면서 본인이 현재 어떤 정서를 느끼고 있는지를 잘 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잘 알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대처/조절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하지만 내 기분을 모르면? 모르면 맞아야지ㅠㅠ RPG로 비유하자면 상태이상에 걸려서 나도 모르게 계속 HP 떨어지는 상황이랄까.

내면행위-표면행위
 논문을 읽다 재미있는(?) 부분이 보였다. 고객의 감정에 맞닥뜨린 감정노동자는 크게 두 가지 행위를 수행한다. 표면행위와 내면행위가 그것이다. 표면행위란 본심을 숨긴 채, 고객 응대용으로 정서를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내면행위란 고객이 느끼는 정서를 노동자 본인도 같이 느끼는 것을 말한다. 예상되겠지만 표면행위는 몸에 좋지 않다. 억지로 미소짓고, 표정을 꾸며야 하니 힘이 들고 결국에는 마음이 병든다. 그렇다면 남은 한 가지, 내면행위가 좋은 것일까?

 내면행위는 단기적으로는 이로울 수 있다. 고객이 슬프면 나도 슬프고, 고객이 기쁘면 나도 기쁘고자 노력한다. 마음의 부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진심으로 고객에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고객의 만족도도 높을테고 연달아 높은 성과, 보상, 주변의 칭찬/인정 등 추가 보호요인을 획득할 가능성도 커진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글쎄올시다. 사실 내면행위는 표면행위보다 더 힘든 노동이다.

 만약 여러분의 철천지 원수가 여러분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고 치자. 여러분은 다음의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달성해야 한다. 1) 억지로라도 좋아하는 척 해보기(표면행위) 2) 진심으로 좋아해보기(내면행위).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히 나에게는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수백배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하루에 만나는 고객이 한둘이겠는가. 매번 고객의 마음 속에 들락날락하며 무리할 순 없다. 그래서 장기간의 내면행위는 결국 '현타'. 즉 스트레스, 피로, 삶의 회의감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내면행위보다 상대적으로 유지가 쉬운 표면행위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상상해본다. 콜센터 업무를 잘할만한 사람은 정녕 따로 있는 것일까? 누구는 마음이 약해 진상 고객 일갈 한번에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다른 누구는 마음이 강철 같아서 아무리 싫은 소리 들어도 끄덕 없이 버티는걸까? 콜센터 업무가 '천직'과도 같아, 그 어떤 진상을 만나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사람이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기질 따라 그나마 덜 아파하는 사람 있을지언정, 누가 일하면서 진상 고객의 말도 안되는 욕설, 투정 듣고 싶겠나. 그 누구라도 억울하고 힘든 일일 터이다. 아무리 어떤 '비법'이 있다 한들 견디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지.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마음의 병이 나는 때가 오겠지. 싶은 생각이 든다.

 결국 환경의 뒷받침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무릇 어떤 문제든 마찬가지겠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1) 진상 손님이 줄고, 2) 감정노동자의 자율성 보장, 감정노동자의 신념 존중, 감정노동자를 위한 복지 향상 등 환경적 요인이 같이 따라줄 때 비로소 감정노동자의 부담이 덜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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