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으로 대박치고 첫 강연에서 망하다
필력이 좋으시네요.
와, 글 진짜 잘 쓰시네요. 한 번에 다 읽었어요.
글쓰기로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가장 뿌듯하고 보람찬 순간은 언제일까? 내 능력을 인정받아 원고 게재 요청이 들어올 때? 책 쓰자고 출간 제안이 올 때? 출간기념회를 열고 팬을 만날 때? 글쓰기로 돈을 많이 벌고 있을 때?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필력 좋다', '몰입해서 읽었다'는 평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필력에 대한 칭찬은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물론 나의 글쓰기 실력이 아직도 한참 모자란 탓이기도 하겠지만 결정적으로 '필력이 좋은 글', '단숨에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는 그 조건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려 한다.
일전에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심심풀이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군대에서 귀신을 본 이야기를 적었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정말 폭발적이었다. 추천 수가 미친 듯이 올라갔고, 결국 그 까다롭다는 '추천게시판'에 올라가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간 브런치스토리를 통해 많은 글을 연재했지만 이 글만큼 압도적인 반응을 들었던 적은 없었다. '필력이 좋다'는 칭찬이 이렇게 과분하면서도 기분 좋은 일인지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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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았다. 1) 글씨의 획에서 드러난 힘이나 기운. 2) 글을 쓰는 능력. 두 번째 정의는 너무 평범하니 제치고, 첫 번째 정의에 주목해 봤다. 뭔가 오묘하다. 드러난 힘이나 기운이라는 게 뭘까? 일상에서 우리가 필력 운운할 때 어떤 맥락인지를 짚어본다면 아마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순식간에 확 빠져들게 만드는 힘', '글이 전하는 내용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간 여러 글쓰기 경험으로 미뤄보건대, 결국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압도적인 추천을 받았던 군대 괴담 썰과, 그저 그런 수준으로 묻혀 버린 지난날의 내 글들을 비교하며 내린 결론이다. 군대 괴담 썰에는 무엇보다 '이야기'가 있다. 실제 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그 어떤 이야기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쓸 수 있었다. 쉽게 들어본 적 없을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고, 그래도 군대 이야기이니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맥락에 제법 공감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구체적인, 생생한(묘사가 풍부한), 안 들어본, 공감이 되는, 흥미로운 이야기
내가 생각하는 '필력 좋은 글'의 조건이다. 이야기가 갖춰지면 사실 별다른 부연설명은 필요치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가 모두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야기는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잔잔한 여운까지 남겨주는 역할을 한다. '~하자', '~를 실천해 보자' 식으로 끝맺기보다 이야기를 통해 끝을 맺으면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글이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처음으로 강사가 되었을 때에도 그랬다. 처음 심리학 강사가 되기로 했을 때, 나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1~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내가 알고 조사해 온 심리학 지식들을 하나라도 더 많이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PPT의 처음부터 끝까지 심리학 이론, 배경, 연구방법, 결과, 교훈 등을 빼곡하게 실었다. 첫 강연이기에 잘해보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었다.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강사님, 죄송한데 강연이 너무 딱딱하고 지루해요.
그랬다. 처참하게 망하고 말았다. 사실 강연 도중에도 뭔가 안 좋은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청중들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다 보였으니 말이다. 경연이 끝난 후, 쓰라린 혹평을 여럿 들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앞으로 잘하면 되죠, 하시면서 과자 한 상자를 선물로 주고 가셨던 것이 기억난다. 집에 와서 눈물 젖은 과자(?)를 삼키면서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밤새 고민을 했더랬다.
군대 괴담 썰로 호평을 들으며, 첫 강연을 통해 처절한 패배를 겪으며 깨달았던 것은 결국 '이야기'의 힘이었다. 이야기가 훌륭하다면 뻔하디 뻔한 주제도 그럴싸하게 들리는 효과가 있다. 유튜브나 TV에서 유명 강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론 자체는 뻔하다. '나를 좀 더 사랑하자', '주변을 잘 챙기자', '인생을 돌아보자', '운동을 하자', '독서를 하자', '일찍 일어나자', '자아성찰하자', '감사하는 삶을 살자' 뭐 이런 내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강연에 설득력이 있다. 바로 '이야기' 때문이다. 강사 본인의 어릴 적 이야기, 주변 가족 이야기, 지인 이야기 등으로 강연을 시작하면 청중들은 어느새 숨을 죽이고 강사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이야기에서 교훈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주제에 설득력이 붙고 사람들은 '강의력 좋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게 된다.
나는 글을 쓸 때, 강연을 할 때 무엇보다 '이야기'에 많은 신경을 쓴다. 하지만 자료 조사하고 전문적인 내용으로 채우는 건 잘해도 '이야기'를 채우는 일이 사실 마음대로 잘 되질 않는다. 써먹을 수 있는 내 이야기, 주변 이야기는 고갈되어 가고, 그렇다고 내가 외향형 인간도 아닌지라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 않으니 새로 업데이트되는 이야기도 별로 없다.
하지만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필력 좋다', '강의력 좋다'는 평을 이끌어 내려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져야 하고, 그 힘은 다름 아닌 '이야기'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생생한, 안 들어본, 공감이 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아 오늘도 나는 기억 속을 뒤적여 본다.
(최근 에세이 책을 내자는 출간 제의를 받았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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