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의 사후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
퇴사를 하고 홀로서기를 한지도 어느덧 반년이 넘어간다. 사실 홀로서기 자체가 처음은 아니다. 그때도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는 대신 강연 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가장 큰 이유는 단언컨대 내가 부모가 되었다는 점이다. 홀로서기 초반이라 그런지(아니, 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입이 들쭉날쭉하다. 잘 벌리는 달에는 출강 요청도 많고, 때마침 책 인세도 들어오고, 검사개발, 데이터분석 외주도 같이 들어온다. 하지만 안 벌리는 달에는 끔찍하리만치 수익이 적다.
수익의 불안정성은 자연스럽게 배우자와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어진다. 내가 괜히 쓸데없이 퇴사를 해서 모두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난 책임 있는 배우자, 아빠가 아닌 건가. 왜 이제라도 다시 취업한다고 선언하지 못하고, 홀로서기한다고 내 꿈을 붙잡고만 있는 것인지.
만약 퇴사를 안 했더라면, 안정적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었을 텐데
만약 내가 홀로서기한다고 고집을 안 부렸더라면, 육아 비용 걱정이 덜 했을 텐데
심리학에는 사후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다른 논문에서는 대안현실사고 라고도 번역한다)라는 개념이 있다. 대학원 때 조교로서 모시던 교수님께서 중요하게 연구하셨던 주제라 개인적으로는 무척 친숙하면서도, 애착이 가는 개념이다.
사후가정사고란, 정말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후회할 때 갖게 되는 생각들을 말한다. 흔히 사후가정사고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If … Then (만약 … 했더라면, … 했을 텐데)
일종의 가정법으로서, 약간 어렵게 표현하면 과거 사건을 마음속에서 변형시켜서, 대안이 되는 현실alternative reality을 상상하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과거 재현, 복기, 시뮬레이션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여러분도 일상에서 사후가정사고 많이 하고 있을 것이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주로 하는 후회의 내용, 형식은 무엇인가? 후회를 하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심리학자들은 사후가정사고를 여러 유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먼저 대안으로 떠올리는 내용(결과)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에 따라 상향upward 사후가정사고, 하향downward 사후가정사고로 구분된다.
만약 내가 공부를 더 잘했더라면, 성적이 더 좋았을 텐데 → 상향 가정사고
만약 공부를 열심히 해놓지 않았더라면, 성적을 망칠 뻔했어 → 하향 가정사고
혹은 결과보다는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번에는 사후가정사고를 첨가additive 유형과 삭제subtractive 유형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먼저 사과를 했더라면, 친구와 화해했을 텐데 → '사과하기'라는 행동을 첨가해서 가정사고
만약 화를 내지 않았다면, 친구와 싸우지 않았을 텐데 → '분노하기'라는 행동을 삭제해서 가정사고
우리는 사후가정사고를 왜 하는 걸까? 즉, '후회'를 굳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찰, 준비, 안도.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사후가정사고는 인생의 지나온 날들을 성찰하는 데 필요하다.
'내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어떤 행동을 했더라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혹시 이런 결말이 있지는 않았을까' 다양한 가능성을 상기하면서 자신의 당시 생각과 행동을 되짚어보고,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흔히 역사에는 IF가 없다고들 한다. 과거의 다른 가능성을 아무리 되짚어본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소용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는 역사에도 충분히 IF가 성립될 수 있다. 역사에 IF를 세움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성찰하고, 정해진 역사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다.
둘째, 사후가정사고는 준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만약 복습하는 습관을 들였더라면, 더 높은 성적을 받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는 곧이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다음 학기에는 복습 전략을 더 철저히 세워야지', '앞으로는 복습을 중점적으로 해야겠어'. 미래에 비슷한 일을 또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면 사후가정사고는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용도로 유용하게 쓰인다.
셋째, 사후가정사고는 안도, 즉 부정적 정서를 낮추고 긍정적 정서를 높이는 역할도 한다.
특히 하향적 사후가정사고(만약 ~했더라면, 더 결과가 나빴을 거야)가 그렇다. '그래도 이만하면 된 거지', '하마터면 더 큰일 날 수도 있었어', '만약 좀만 더 방심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었을지 몰라'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부정적인 정서를 완화한다.
물론 사후가정사고가 언제나 좋은 기능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일어나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게 함으로써, 혹은 비현실적 가정을 하게 만듦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수는 빨리 잊고 털어버려야 할 때도 있건만, 혹은 단지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됐을 뿐이거늘, 계속 이런저런 가정을 붙이면서 죄책감, 후회에 잠겨 있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만은 아니다.
퇴사를 안 했더라면, 나는 끝끝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더 불행했을 거야
계속 직장을 다녀야 했다면, 육아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없었을 거야
내가 더 열심히 강연하고 홍보했다면, 더 수익이 많아질 수 있었을 텐데
사후가정사고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기왕이면 내가 퇴사를 하고 홀로서기하며 느꼈던 후회의 종류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를 안 했더라면, 더 좋았을 거야' 따위의 생각들은 다음에 재취업을 하게 될 때에나 유용한 지침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질렀고, 이제 와서 꼴 사납게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수 없다. 아직도 해볼 것이 많은데, 내 메모장 속에는 아직 실현해보지 못한 흥미로운 기획들이 넘쳐나는데 여기서 다 포기하기에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평생 남을 것만 같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건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육아에 펑펑 돈을 쓰고 싶은데, 현실적인 여건이 다 허락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도 퇴사를 한 덕분에 자율적으로 스케줄을 짤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평생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내 아이가 갓난아기일 때의 예쁜 모습들을 가능한 많이 보고 기억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더 열심히 노력해서 수익도 안정화시키고, 더 좋은 것, 예쁜 것 많이 사주겠다고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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