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이 별로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일지 몰라도, 어렸을 때는 '안 되는 게' 참 많았다. 특히 나는 게임을 정말 좋아했는데 우리 집에는 게임기도 없었고, 컴퓨터는 당연히 없었고, 뭐… 그래서 학교 끝나면 곧장 집으로 안 가고 꼭 친구네 가서 같이 게임을 하곤 했다.
겜보이 사가지고 올게
아마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를 집 보게 놔두고 아버지와 외출하시던 어머니는 못내 내가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내게 귓속말로 '겜보이'를 사다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이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서 오매불망 부모님이 외출에서 돌아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겜보이'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겜보이'만 가지고는 게임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이야 결제하고 DL판을 다운받으면 되지만 그때는 '게임팩'이 반드시 있어야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셨던 어머니는 내 모습을 보시면서 왜 겜보이를 사줬는데도 게임은 안 하고 저리 울상일까, 싶으셨을 것이다.
근데 게임팩 가격이 여간 비싼 게 아니다
간신히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게임팩을 하나 장만했다. 요즘 AAA급 게임에 비하면 그래픽도 조악하고, 플레이타임도 얼마 안 하는, 그런 게임이었지만 나는 이거 아니면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깨면서 말 그대로 그 게임을 뼛속까지 '발라먹었다'. 질리지 않았냐고? 물론 자꾸 하다 보면 질렸다. 하지만 유일한 대안이었기에, 그 게임이 주는 의미는 내게 무척 각별했다.
어렸을 때 재밌던 게 이제와서는 왜 재미가 없나?
예전에는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한 통제력이 없었다.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정기적인 용돈을 제외하면, 아버지 구두닦기, 흰머리 뽑아드리기 같은 거밖에 없었다(흰머리 1개에 100원은 너무 적어서 불만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소싯적에 게임 좀 해봤다는 사람들은 그 감성을 알 것이다. 꼬깃꼬깃 쌈짓돈을 몇 달씩 모아가지고, 드디어 갖고 싶던 게임 패키지를 딱 하나 골라오던 그 감성 말이다. 그때는 그래서 재미있었던 것 같다. 게임이 좀 구려도, 불친절해도, 그래픽이 후져도, 스토리가 이상해도, 너무 짧아도 그냥 재미있었다. 요즘은 아무리 재밌는 게임이라도 한번 깨고 나면 금방 잊히는데, 그때는 내가 거쳐 갔던 게임 하나하나가 특별했다.
구라 없이, 난 이 열혈하키를 족히 100번은 깼다. 지금 해봐도 발로 깨는(?) 실력이다.
성인이 되면 경제력이 생긴다. 아직도 명품이나 집, 차 이런 건 쉽게 살 수 없지만 그래도 일상에서 내가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누리는 건 솔직히 일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나의 게임 라이프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뭐든 언감생심, 게임 잡지나 들춰보면서 상상하기나 하고 데모 버전이라도 감지덕지하며 플레이했지만 지금은 스팀 라이브러리에 사놓고 안 하는 게임들이 그득그득하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즐겨 온, 나와 같은 분들이라면 아마 공감할 것이다. 분명 게임의 질은 과거보다 지금이 월등해졌는데도, 게임을 구매할 경제력도 그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음에도, 왜 어렸을 때 했던 게임이 더 재미있게 느껴질까? 그땐 게임불감증 같은 것도 없었고, 학교 마칠 시간만 되면 집에 달려가서 게임할 생각에 벌써 두근두근 하곤 했는데. 왜 지금은 그때의 그 기분이 나질 않을까?
통제력의 저주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통제력'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조작하고, 변화를 만들며, 자율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안정감을 느낀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돈'을 좇는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보면 그 역시 '통제력' 추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돈이 있어야 안전하게 울타리를 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타인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그 '게임하는 맛'을 그리워하며, 문득 '통제력'이 마냥 좋지만도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옛날에는 '안 되는 게' 참 많았기에, 더 간절했고 더 재밌었고 더 행복했지만 요즘은 반대로 '되는 게' 참 많으니까 덜 간절하고, 덜 재미있고, 덜 행복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걸 '통제력의 저주'라 불러야 할지 참… 여담이지만 그래서 요즘 돈에 대한 욕심이 좀 줄었다. 더 가지면 행복할까? 아니, 인생이 너무 시시해져서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요즘 도파민 디톡스, 도파민 다이어트라는 말이 들려온다. 유튜브, 넷플릭스, 게임, 쇼핑 등등 재밌고 자극적인 게 너무 많으니까, '되는 게' 너무 많으니까 뇌가 도파민 과잉을 감내하지 못하고 그만 모든 게 다 시시해져 버리는, 그런 불상사를 막자는 움직임이다.
솔직히 요즘 나는 도파민 다이어트가 너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주변에 볼 것, 할 것은 넘쳐나는데 도통 진득하게 몰입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금방 지루해지고,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일 것 같고, 이거 아니어도 볼 건 많으니 괜히 영상에다가(?) 엄포를 놓게 된다. 딱 10초 준다. 그 안에 날 자극시켜. 재미없으면 뒤로 가기 누를 거야.
이제 누가 통제해주냐
과거에는 통제력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쉬웠다. 뭐 좀 게임에 빠질만하면, 만화책에 빠질만하면 '숙제는 다 하고 노는 거야?'라는 부모님의 잔소리와 제지가 있었다. 당시에는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부모님의 통제가 있었기에 열심히 공부해서 이렇게 먹고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고 제지하는 부모님이 없다. 꼴(?)에 좀 컸다고, 부모님이 전화기 너머로 잔소리 좀 하시려 하면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저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 이런 소리나 하며 흘려듣는다. 그나마 옆에 와이프가 있어서 새벽부터 게임한다고 등짝을 맞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의 통제에 비하면 이건 약과다.
이누공..아니 이누통ㅜㅜ
결국 어른이 된 우리들은 스스로 통제력을 기를 수밖에 없다. 외부에 강력한 통제자를 둘 수 없으니, 내부에 스스로를 검열하는 강력한 통제자를 두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알듯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반복적인 훈련과 노력, 연습이 필요하지만 잠깐 해보다가도 금세 원래 위치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간단한 운동과 산책
명상하기
휴대폰 없는 시간 만들기
독서하기
멀티태스킹 줄이기
배달 음식 줄이기
일기 쓰기
흔히 도파민 다이어트 방법으로 제시되는 항목들이다.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씩 실천해야겠지만, 오늘도 나는 습관적으로 유튜브를 켜고, 짧은 동영상을 보고 있다. 밥 짓는 게 귀찮아서 배달시키고, 움직이기 싫어서 빈둥거리고 있다.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잠시 집중해서 이 글을 쓴 나 자신 칭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