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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튜브 볼 때 뒤로가기 안 하는 이유

효율의 역설에 관하여

나는 극한의 효율 추구자였다



첫째, 유복하지 못했던 과거는 내게 다양한 가치와 신념들을 체득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나는 돈과 물질에만 마음을 쏟게 되었다.


둘째, 난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 일한들 그 끝이 형편없다면 지난날의 내 노력들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셋째, 난 인정욕구의 화신이었다.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 역할을 오롯이 떠맡겼다. 주변의 칭찬에 목을 맸고 그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일만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극한의 효율 추구자가 되어 있었다. 돈과 관계없다면 흥미를 잃었고, 해봐야 잘 안될 것 같으면 포기했고, 알아주지 않을 것 같다면 시도하지 않았다.


... 근데 그렇게 사니까 삶이 공허했다. 재미가 없었다.






대학원 시절, 나를 가르치신 교수님께서는 여가 문제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다. 심리학자로서는 드물게 여가 연구도 많이 하셨고, 여가 학회에도 모든 제자들을 데리고 꾸준히 참석하셨다. 여가 관련 정책 결정에도 힘을 보태셨고, 제자들에게 여가산업에서 일하는 심리학자가 되어보라 제안도 하셨다.


교수님은 여가에 최선을 다하는 분이셨다. 일할 때는 일에 몰두하셨지만 쉬실 때는 최대한 행복하게 보내려 노력을 많이 하셨다. 가족들과 여행도 정말 자주 다녀오셨고, 새로운 취미 늘리기에도 여념이 없으셨다. 그런 교수님을 보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마치 심리학자로서,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라는 걸 온몸으로 직접 증명하시는 것 같았달까. 시간이 많이 흐르고, 극한의 효율 추구로 인해 번거로운 여가를 거부한 지 오래인 나는 이제야 그때 그 교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놀아야 한다. 그냥 놀기만 하면 안 되고 잘 놀아야 한다. 그래야 돈과 물질이 채워줄 수 없는, 삶의 나머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요즘 나의 삶은 고달프다.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일도 일대로 나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힘든 이유를 이쪽에서 찾고 싶지 않다. 쉬는 시간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데서, 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짚고 싶었다.



스낵컬처snack culture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단적인 예로 유튜브 숏츠가  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하니 다른 의미에서 이 스낵컬처라는 작명이 절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유튜브 숏츠를 무슨 감자칩 씹듯 삼키며 여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먹는 순간은 즐겁다. 달콤하고 짭짤해서 좋다. 다만 감자칩 먹듯 계속 숏츠만 퍼먹다 보니 내가 말초적인 자극에만 절여진 듯한 공허함이 생긴다. 물론 감자칩만큼이나 (정신)건강에도 해롭다. 내가 뭘 본 건지, 귀중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낸 건지 기억이 안 남는다.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추억도, 의미도 남지 않는다. 아, 이 짜증 나는 즐거움이란.



재미는 있는데 왜 기억에 남질 않지...




뒤로가기 금지


작은 도전을 시작했다. 당장 유튜브를 끊긴 어렵다. 그러나 보면서 생각이란 걸 해보려 한다. 그래서 나는 '뒤로가기 금지'라는 제약을 자신에게 걸어보기로 했다.

 

성인ADHD같이 집중을 못하고 자꾸 빨리 감기, 넘기기 하면서 보다 보니까 기억에 남는 게 없다. 효율은 늘었을지언정 그 안에 남는 의미는 없어졌다. 지루한 시간이 있어야, 그 시간 안에 내가 곱씹어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생각도 정리해 보고, 두루두루 자세히 감상하며 기억에 남기는 것인데, 핵심만 짚는다고 빨리빨리 보다 보니깐 정작 남는 게 없고 공허하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뒤로 가기, 빨리 넘기기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딴생각을 할지언정 그 지루함조차 참으며 어떻게든 생각을 하며 의미를 만들어보고 싶다. 적어도 내가 오늘 무슨 무슨 영상을 봤는지 기억하고 곱씹을 수 있게.


그렇게 뒤로가기 없이 주어진 영상을 다 보는 습관을 들이고 나니 그 맛이 생각보다 꽤 괜찮다. 지루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나쁘지 않을 때도 많고, 이런저런 머리를 굴리다 보니 여러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들도 잘 떠오르는 것 같다.


새삼 인생에 일정 비율의 노이즈는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난 비록 효율만 좇아 살아왔지만 효율만을 위해 움직이다 보면 역설적으로 비효율에 빠진다. 남는 기억이나 의미도 없고, 맨날 마음은 급하고, 그럴수록 까먹고 빠뜨리는 것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효율과 비효율 사이에도 황금비율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적당히 노이즈가 있어야 오히려 효율이 늘어나는 아이러니.


그러니 여러분도, 나도 재미없는 영상 잘못 골랐어도 뒤로가기 하지 않고, 빨리 넘기지 않아도 된다. 

그 비효율에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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