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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웠던' 부모의 은혜

부모화(parentification)에 대한 일화

  내가 여태까지 너에게 먹여주고, 재워준 것이 얼마인데



  이 말이 가슴속에 깊이 박혀 들어온 것은 언제였을까. 한두 번 듣던 말도 아니었다. 살림 꾸려가는 것이 유난히도 어려울 적이나, 간간히 반항심을 앞세워 대들기라도 했을 때 종종 듣고는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날 먹여주고 재워주었다는, 그 말이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나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나를 먹여주고 재워줘 왔던 것일까? 나는 왜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일까?받았다면 무언가를 돌려주는 게 맞지 않을까?


  내게는 부모의 ‘은혜’가 아니었다. 그 ‘은혜’라는 것들이 전부 다 ‘빚’이라고 생각했다. 감사함을 느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언제야 갚아야 할 것들로 여겨졌다. 갚으라고, 독촉할 것만 같아 줄곧 두려워했다. 나는, 나는 언제쯤 저 ‘빚’을 갚고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학창 시절 나는 아끼고 또 아꼈다. 지금은 보잘 것 없었지만, 비루하게도 아무런 힘도 없어서 ‘빚’을 늘려가고 있지만 나중을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힘을 키워야만 했다. 돈 생기면 일단 안 쓰는 것이 나의 습관이 되었다. 학교에 가면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로 공부한답시고 억지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댔다. 빨리 그 ‘빚’을 갚을 수 있도록, 그래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성인이 되고 대학에 들어서니 ‘빚’이 늘어가는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춰볼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와 학점을 열심히 챙겼다. 등록금을 혼자서 모두 채웠고, 용돈을 조달했다. ‘빚’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직 내 힘으로 무언가를 마련한다는 것은 나의 빛나는 자부심이 되어갔다. 그러나 잠시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겠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등록금을 달라고 했다면, 용돈을 달라고 했다면 받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 ‘부채의식’이라는 것은 정말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그렇지 않았을까? 우리 집이 이렇게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빚’이었을까? 아니다. 이건 환경과의 타협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 벗어나야 한다는 이 생각들은 무엇보다 우리 사이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아무런 힘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감당키 어려운 요구들을 감내해야 했던가.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든가, 신체적 학대를 강요받은 것은 아니었다. 나의 부모는 분명 나를 사랑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롯이 당신께서 가지고 있던 마음속 상처들이 너무 쓰라리고 깊었을 따름이다. 스스로 이겨낼 힘은 없었으며, 다만 마음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이 어린 나의 눈에도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때부터였을까. 나에게 아프다고 말했다. 마음이 아프다고, 슬프고 괴롭다고 자주 울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애타게 물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를 물었고, ‘자기편’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 누구의 편이 되어줄 수도 없었으므로 차라리 혼자가 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요구들을 차마 다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아예 신세 지는 일을 없애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야 ‘당당하게’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 테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가. 당신께서 베풀었던 진심이 자녀의 마음속에는 ‘빚’으로 켜켜이 쌓여 왔다니.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그 ‘부채의식’에 관하여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볼 수 없었다.


  ‘내가 여태까지 너에게 먹여주고, 재워준 것이 얼마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실 그것은 하소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절박해서, 하도 절박해서 결국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호소는 아니었을까. 다만 그때의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물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겁이 났고, 멀어지려 했다. ‘빚’을 없애버리고 거부하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살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더 이상 ‘부채의식’을 고백하는 것도,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차라리 잘 된 일이었을까, 한스러운 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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