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국 정부, 국회, 민간단체는 한강 하구 공동 관리를 반대했다
한강 하구는 지정학적 지경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6.25 전쟁 시 정전 협상 과정에서 이 수역을 남과 북 중에서 어느 한쪽이 가질 수 없는 중립 수역으로 설정하게 된 사연이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11년도에 발간한 [군사분계선과 남북한 갈등]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정전협정에서 임진강과 한강 하류가 만나서 서해로 들어가는 한강 하구를 중립 구역으로 설정했다. 1952년 2월 초의 휴전 협상에서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이 합의한 한강 하구 위치는 임진강 하류를 중심으로 김포군과 장연군과 파주군이 연결되는 삼각지점을 시작점으로 하며 한강과 임진강의 교우점이다. 여기서 강화도 북방을 거쳐 옹진반도 남강 남안의 섬들은 유엔군이 관리하고, 강의 북안은 공산군이 장악하게 되어 있다. 한강하구 범위는 길이가 약 50마일이고 폭은 약 6마일이다.
1951년 9월 양측의 경계선은 한강 일대였다. 1951년 9월 28일 오스트레일리아 군함인 HMAS Murchinson이 한강에 진출하여 북안에 배치된 공산군 측 포병부대와 교전하였다. 그 이후에도 이곳은 전선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휴전 협상 당시 공산군 측 세력 아래 있는 한강 하구에 대한 관리 문제가 1952년 2월 8일 판문점 감시분과위원회에서 쌍방의 협정에 의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또한 한강 하구와 옹진반도에 이르는 경계선 확정에도 합의를 하였다. 이에 따라 정전협정에 의해 한강 하구의 수역으로 그 한쪽 강안이 일방의 통제 아래에 있고 그 다른 한쪽이 다른 일방의 통제 아래 있는 곳은 쌍방의 민간 선박의 항행에 이를 개방하도록 했다. 이 지역의 항행 규칙은 군사정전위원회가 규정하도록 했다. 쌍방 민간 선박이 항행함에 있어서 자기 측의 군사 통제 아래 있는 육지에 배를 갖다 대는 것은 제한받지 않도록 했다.
한강 하구 공동관리에 대한 구상을 어느 쪽이 먼저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휴전 협상 의제 3항 참모회의 유엔군 대표인 D. O. Darrow 대령이 양측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강 하구는 개방 수로(open water way)로 해서 어느 쪽이든 상대방의 한강 하구 이용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것을 보면 유엔군 측도 한강 하구 공동관리에 적극적이었다. 공동관리 합의 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이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보낸 서신에 보면 그런 의도가 나타난다. "한강 어귀의 통제라는 문제는 당연히 경계선에 관한 이전의 협정에서 제기되었다. 우리 대표단이 공산군 측에 양보를 표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한민국의 이해를 보장하려는 시도를 반영했다. 한쪽의 제방이 그들에 의해 조정되고, 다른 쪽 제방이 다른 한 측에 의해 조정될 때는 언제든지 한강 어귀의 물은 양측의 해상 운송에 열려있을 것이다"라면서 대한민국의 한강 어귀에 대한 자유로운 사용이 협정에 의해 확정된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경계선은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기회로 채택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한강 하구 공동관리에 합의한 이후, 남북한의 입장은 달랐다. 북한 측은 정전협정 체결 후 한강 하구에서 민용 선박 항행 규칙이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비준된 사실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한강 하구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다. 반면, 한국 정부와 국회, 국민 모두는 수도 서울의 목인 한강을 양측이 공동 관리한다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다. 군사적으로 서울 북방에는 방어선이 될 만한 천연 장애물이 거의 없어서 북한군이 임진강을 건너면 서울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판문점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 유재흥 소장이 반발했고, 이기붕 국방부 장관도 미 8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밴플리트 대장에게 한강 하구 공동관리 문제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휴전회담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와 국민들의 의사를 전달했다. 1952년 2월 13일 허정 국무총리 서리는 유엔군 측의 계속된 양보로 "반역자 공산주의자들의 모욕과 자만에 굴복한 유엔군의 굴욕적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비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승리자처럼 행동하는 공산군에 대한 수치스러운 유엔군사령부의 양보"라고 비판했다. 1952년 2월 14일 국회에서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강 어귀의 국제적 통제에 관해 판문점에서 있었던 용서할 수 없는 양보를 수정해달라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유엔군 측의 한강 하구 공동관리 동의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많았다. 한강 하구 공동관리는 경인 간의 수로를 차단함으로써 이 지역의 경제적 생활 측면에서 커다란 암적 존재이며, 이는 한강 연안 어민에 대한 사형선고라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이훈재는 "공산 반역도당에게 한강 하구 관리에 가담케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것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요, 이 나라의 치안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삼천만은 거족적으로 반대하여야만 된다"라고 주장했다. 한강 연안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김창국은 이렇게 말했다. "선조 시대부터 한강 연안 강줄기에서 고기를 잡아가지고 일가의 생계를 도모하였습니다. 이 지대가 중립지대로 들어가면 우리 민족들은 어디로 가며 어찌 생계를 유지합니까? 생각하면 피눈물만 나옵니다. 사변 이후 온갖 고난을 타개하고 나의 생업을 수호하여 왔습니다"라고 주장하며 공동관리 안이 본 회의에서는 철회되길 바란다고 호소하였다.
6.25 전쟁 발발 이전에는 38도선 이남에 위치한 옹진반도와 개성을 포함한 한강 하구 일대가 모두 남한만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와 국회와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전 협상에서 한강 하구를 공산군 측과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것은 우리만의 것을 내주는 형국이었기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반면 당시 해상과 공중 우세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한강 하구 북안을 점령하고 있었던 공산군 측은 민간 선박 항행을 위한 한강 하구의 공동 관리 조건이 정전 협상에서 공산군 측에 불리할 것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