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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May 18. 2021

6·25 전쟁과 해병대 군인교회

[해병대 교회 70년사 1951-2021]

프롤로그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기억하는 해병대는 “깡생깡사(깡으로 살고 깡으로 죽는다)”란 이미지가 강하다. 딸이 사귀는 남자가 장교라고 하면 흐뭇해하던 부모가 해병대 장교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유다. 하지만 사실상 해병대는 전쟁터에서도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을 만큼 종교심이 강한 군대다. 6·25전쟁 중 중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동해와 서해 도서지역 어디서든 해병대원들의 발길이 닿는 작전 지역마다 천막과 퀀셋(Quonset)으로 군인교회를 설립했고, 베트남전쟁 중에는 이역만리 타국 땅에도 교회당을 지었다. 그만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전장에서 절대자에게 의존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 해병 제1연대가 6·25전쟁 중에 세웠던 교회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해병 제1연대 퀀셋교회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천막교회
서해 석도군인교회
동해 양도군인교회
베트남 호이안 청룡교회
베트남 전초기지 위문예배




전쟁터의 제1연대본부에 천막교회를 세우다


박창번, 송창설, 이선동, 오봉운은 해병대에서 정식 장교로 임관한 최초의 군목들이다. 그중 박창번 군목과 송창설 군목은 해병 제1연대가 난공불락의 요새인 도솔산 지구에서 전투를 감행하던 시기에 그곳으로 부임했다. 도솔산은 38도선 이북 양구와 인제 사이에 위치한 태백산맥의 주봉이다. 이곳은 방어에는 유리하고 공격하기에는 불리한 전략적 천연 요새지였다. 적은 이곳을 확보하려고 인민군 최강부대인 제5군단 제12사단과 제32사단을 배치했다. 세계 전사상 용맹성이 알려진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도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해병 제1연대는 악전고투와 아비규환의 백병전 끝에 이 난공불락의 요새지를 함락시켰다.   

           

도솔산전투 승전보를 듣고 전투현장을 찾은 이승만 대통령, 우측이 연대장 김대식 대령이다. 이 대통령은 여기서 해병 제1연대에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했다.


해병 제1연대에 교회를 세움으로써 전쟁터에 복음의 씨앗이 심어졌다. 당시 연대장은 신앙의 용장 김대식 대령이었고, 박창번 군목이 연대 군목실장, 송창설 군목이 보좌관이었다. 연대장과 일부 참모들의 협조와 박창번, 송창설 군목의 노력으로 연대본부에 천막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이 교회를 ‘해성(海星)교회’라고 명명했다. 군대 교회에 특수한 명칭을 부여한 것은 민간교회의 예를 따른 것이다. 모든 준비를 갖추고 1951년 7월 첫 주일 11시에 창설예배를 드리기로 햇다. 그러나 그 시각 적의 포탄이 연대본부에 쏟아져서 예배시간을 저녁으로 연기하여 창설예배를 드렸다. 이후 많은 장병들이 주일마다 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작전을 전후한 출전예배와 귀대예배가 지속되었고, 전방부대를 위한 순회예배도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전도지와 성경이 전선의 각 참호까지 전달되었다. 군목들은 개인상담은 물론 부상 장병을 위로하였으며 전사자의 장례식도 주관하였다. 박창번 군목은 8월 17일 해병대사령부 군목실장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9월 초순에 제1연대를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송창설 군목이 제1연대의 모든 군목업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제3대대장 김윤근 소령은 점령한 도솔산 산정에서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는 한편 이미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전우들을 떠올리며 기도로 격전장에서 승리했다고 말했다. 김윤근 대대장은 신앙의 사람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전면 철수를 감행할 때 제3대대도 원산으로 철수를 했었는데, 그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기도로 타개한 그의 신앙의 모습을 당시 예하 중대장이 쓴 수기에서 엿볼 수 있다.     


제3대대는 중동부전선 동양리에서 적의 대부대의 포위를 받게 되었다. 도로 교량은 전부 파괴돼서 도저히 이 포위망을 뚫을 길이 없다고 판단했고 전멸을 면치 못하는 위급한 사태였다. 미 육군 1개 탱크중대가 지원부대로 동원되었으나 무참히도 적에게 희생되었다. 온 부대가 아수라장이 되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한 가운데 엄동설한에 눈까지 무릎 위까지 펑펑 쏟아져 내리던 그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는 바로 그때, 쌓인 눈 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김윤근 대대장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두 손 모아 비는 대대장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쏟아져 흘렀다. 수라장이 된 절망의 전쟁터에서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하는 대대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엄숙해 보였다. 그는 필시 자신의 구원보다도 부하들의 생환을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 모습이 어찌나 거룩하게 보였는지 나도 그만 감동되어 오! 주여! 하고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얼마 후에 마전리로 이동하였는데 그 절망적인 포위망을 돌파하여 목적지로 이동하는 동안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히 철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기적이 아닌가? 참으로 대대장의 기도의 은혜임을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1951년 8월 27일 제1연대는 중동부 전선의 924고지 탈환 작전에 투입되었다. 924고지는 도솔산의 주봉 중의 하나로서 지근거리에 금강산이 보이는 전략적 지대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아군이 북한 지역으로 깊숙하게 침투할 수 있는 중동부 전선의 관문이었다. 적은 이곳에 3군단 제1사단 제3연대를 투입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아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그곳을 김일성 고지라고 명명하였다.     


이 김일성 고지 탈환작전도 도솔산 전투에 못지않은 치열한 격전이었다. 연대장 김대식 대령이 부상으로 후송되기까지 했다. 제1연대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을 때, 송창설 군목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구씩 전사자를 매장해야만 했다. 사체처리장교의 임무를 띠고 합동묘지를 선정하여 일일이 전사자를 위해 기도하고 매장하였다. 또한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전몰장병을 위한 이별과 추모의 예배를 드렸다. 38선의 장벽이 무너져서 남과 북이 서로 왕래하게 될 먼 훗날을 위해 전사자들은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묻혔다.     


송창설 군목은 많은 전사자들의 영혼을 구원하였다. 전사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안고 사망했다. 전사자들의 유물이 이를 증명한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해병대원들의 유물 속에는 유독 성경과 쪽복음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전선에서의 벌어진 에피소드 중 하나를 소개한다. 적의 포탄이 연대본부에 쏟아질 때 모든 장병이 천막교회로 피난 차 모여들었다. 어려울 때 찾아야 할 곳이 교회라는 것을 그들 모두 느낀 것이었다. 송창설 군목은 그들을 위해 위로하며 기도하고 격려해 주었다. 9월 3일 김일성 고지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송창설 군목은 그 이후 이원동 군목이 부임하기까지 제1연대 교회에서 봉사하였다. 이원동 군목은 12월 1일부로 부임하였고, 송창설 군목은 같은 날짜에 진해 해군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 부대에 부임한 후임 연대장 공정식 중령은 인내와 신앙으로 승리하는 부대를 만들기 위해 장병들의 신앙을 권고하며 군종업무를 도왔다.     





중동부전선에 천막교회를 세우다


제1연대 교회는 1951년 12월 11일 부임한 이원동 군목의 노력으로 중동부 전선의 전투 중에도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당시 제1연대는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 점령 임무를 마치고 9월 4일부터 펀치볼 지구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김석범 연대장의 배려로 새로운 주둔지의 언덕 높은 곳에 제1연대교회가 천막으로 세워졌다.     


전선에서 군종업무는 분주하다. 전사자의 장례식이 군목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 이원동 군목은 연대본부교회를 비롯하여 각 대대 및 전차중대를 순회하면서 주일에는 평균 5회의 예배를 인도했다. 주일 밤에는 김일성 고지에 주둔한 미 해병 공병대대에 가서 한국인 노무자를 위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전후방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가정통신이 계획 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수천 통의 가정통신이 왕래했다. 개인상담의 양도 매우 많았다. 전쟁의 염려 속에서 인간의 삶이 더욱 고달프고 절박하기 때문이었다. 장병 위문행사도 크게 행해졌다. 이원동 군목은 서울, 인천, 때로는 부산까지 출장을 가서 교육기관을 비롯한 여러 단체의 도움으로 많은 위문품을 수집했다. 이 위문품은 전투에 시달린 많은 장병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험산준령의 이 살벌한 전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운과 포성에 퇴색되지 않았고 전방의 참호 속으로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갔다. 이원동 군목은 32절지 양면 등사로 만든 팸플릿 「신앙전선」을 전방 참호까지 배부했다. 이 팸플릿은 신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신문 한 장 볼 수 없는 장병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미디어의 역할을 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올렸다.     





서부전선에 천막교회를 세우다


1952년 3월 17일 제1연대는 김포지구의 해병 제5대대와 연결하여 수도 방어의 새로운 임무를 맡고 중동부 전선에서 서부전선 장단 지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장단 지구에서도 제1연대교회는 연대본부의 제일 높고 좋은 장소에 천막으로 설치되었다. 이 교회는 잔디를 떠서 의자와 제단을 만든 순수 야전교회였다. 여기에서도 이원동 군목은 말씀을 맡은 자로서 장병의 봉사자로서 군목업무를 계속하였다.     


나날이 계속되는 전투로 전사자는 그칠 줄 몰랐다. 이원동 군목은 해병묘지를 정해서 그곳에 전몰용사의 유해를 매장했다. 이것이 서부전선의 해병묘지가 되었다. 그곳에 처음 무덤을 판 것은 이원동 목사였다. 처음 무덤에 그는 “기억하라! 해병대 용사 이곳에 잔다”라는 묘비를 세워 주었다. 이 묘비는 전사한 모든 해병용사에게 영원한 안식을 희구하는 마음에서 세운 것이다.     


1952년 8월 20일 김덕순 군목이 이원동 군목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연대 본부의 천막교회를 위시하여 공병중대, 의무중대, 각 대대, 각 중대, 소대 등에 순회예배가 계속되었다. 김석범 연대장은 전투를 전후해서 항상 출동예배와 귀대예배를 드리도록 방침을 세웠다. 성례전도 수시로 거행되었다. 전사자를 위한 장례식도 빈번했기 때문에 해병 합동묘지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제1전투단으로 승격되면서 반목조천막교회로 개축하다


1952년 10월 8일 제1연대 군목실은 해병 제1전투단 군목실로 승격했다. 해병 제1연대를 기간으로 독립 제5대대, 제1포병대대, 제1전차중대, 제1공병중대가 통합되어 제1전투단이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구의 승격은 군종업무에 한층 활기를 불어넣었다. 당시 전투단장 김성은 대령의 배려로 백색 십자가 마크가 표시된 지프 1대가 군종실에 할당되었다. 기동력은 군종업무의 불가결한 요소지만 전방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종전에 사용하던 전방의 천막교회가 반 목조 천막교회로 개축되었다. 이 사업을 위해 미 해병사단에서 많은 건축자재를 지원해 주었다. 이 개축공사는 1952년 11월에 끝났다. 당시 미 해병사단에는 30명 정도의 군종장교들이 근무하고 있어서 이 교회 건축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 해병대를 도와주고 있었다.     


당시 전투단장 김성은 대령은 교회개축 현장에 나와 마루목에 못을 박고 작업을 지시하였으며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통영작전에서 기도로 승리한 일화를 갖고 있었다. 그 일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은 섬과 같은 통영에는 이미 괴뢰군이 포진하고 엄중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기습 상륙할 것인지 가슴 설레었다. 이때 김 부대장의 머리에 번뜩이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는 갑판 위에 있는 작은 포대 옆에 꿇어앉았다. 조국의 운명을 위하여 김 부대장의 피땀 나는 기도는 시작되었다. (중략) 몇십 분간 기도 시간이 지났다. 김 부대장은 똑똑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시를 받았다. (중략) 새벽 5시를 기해 상륙을 감행하여 하루 만에 통영은 탈환되고 (중략) 김 부대장의 피나는 기도는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위대한 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위의 단락에서 쓴 것처럼 김성은 대령은 1950년 8월 17일~9월 22일까지의 치열했던 통영지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해병대의 별칭을 갖게 한 장본인이다. 김성은 대령은 제4~5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하고 퇴역한 후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그는 통영지구 전투를 회고하며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나에게는 사자와 곰의 무서운 발톱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이 있었다. 그동안 하나님은 나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곰과 사자같이 무서운 적들의 발톱에서 구해주셨는데, 이번에도 우리 편에서 싸워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보다 월등했던 적과의 싸움은 거인 골리앗과 싸우러 가는 소년 다윗의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셨음은 골리앗이 다윗을 얕보다 물맷돌에 무너진 것처럼, 적으로 하여금 우리를 얕보게 해 우리가 상륙할 때나 진격할 때도 적들의 눈을 감게 해 우리의 성공을 도와주셨다는 것에서 나타났다. (중략) 이 모두는 결국 하나님의 도움이었고, 대한민국을 지켜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큰 역사에 나를 중요한 도구로 사용해 주셨음에 감사한다. 통영상륙작전은 모두가 전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큰 계시와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크신 역사였다. 전투가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날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못하며 이는 조국 수호에 큰 계기가 되었음을 밝힌다.     


당시 제1전투단의 종교활동 현황은 다음과 같다. 매주 주일 10~11시 전투단본부 예배, 금요일 18~19시 공병중대 예배, 월요일 14~15시 의무중대 예배, 토요일 14~15시 헌병대 영창예배가 각각 실시되었다. 더 나아가 대대, 중대, 소대에서 순회예배가 실시되었고, 이때 상담과 전도와 각종 팸플릿 분배 등의 업무가 병행되었다. 민간교회와의 연락도 긴밀하게 지속되었으며, 1953년 성탄절 행사는 특히 성대하게 행해졌다. 김덕순 군목은 후방교회의 도움으로 커다란 황소 3마리를 시장에서 직접 구매해서 각 대대에 분배했다. 후방 교회는 물질뿐만 아니라 위문단을 구성해서 장병위문도 했다.     


1953년 6월 30일 김광덕 군목이 김덕순 군목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의무대대를 주간 2회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린 후의 그들의 눈동자는 죽음의 두려움만이 깃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김광덕 군목이 술회하였다. 그는 김대식 전투단장에게 건의해서 전쟁으로 황폐해진 문산 시가를 불도저 2대로 정지작업을 해서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주민들이 고향을 찾아 안주하게 해 주었다. 1954년 1월 20일 오봉운 군목이 실장으로 부임하자 김광덕 군목은 제2대대로 배속되어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오봉운 군목은 1회에 7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당시 전투단 본부는 문산 외곽지대로 이동했고 연대본부교회가 군용 퀀셋 건물로 새로 지어져 있었다. 연대본부교회의 주일예배에는 평균 70~80명의 교인이 모였다. 주간에는 예하 7개 중대의 순회예배가 진행되었다. 이때 문산감리교회와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이글은 작가의 책 [해병대 교회 70년사] 제6화와 제9화에서 부분 발췌한 것이다.

https://m.bookk.co.kr/book/view/10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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