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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Jul 04. 2023

해병대의 보훈 역사와 과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호국(護國)은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 보훈(報勳)은 ‘공훈에 보답한다’는 의미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그에 보답’하는 것이 호국보훈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6·25 전쟁기에 목숨을 담보로 나라를 지킨 해병대원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그에 보답하기 위해 대한민국 해병대가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지 살펴본 후, 향후 발전시켜야 할 과제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

  1949년 4월 15일 창설된 우리 해병대는 1950년 공산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8월 통영상륙작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경인지구전투, 이듬해인 1951년 6월 도솔산지구전투, 9월 김일성-모택동지구전투에 참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1951년부터 1953년 휴전 직전까지는 양도작전, 장단-사천지구전투에 참가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참여했던 해병대는 외신기자로부터 ‘귀신 잡는 해병,’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 해병’이란 칭호를 얻었고, 그 전통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병대에서 확인한 역사 자료에 의하면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해병대원은 1,826명이다. 국가기록원에서 집계한 해군(해병대 포함) 전사자 1,903명 중 96%가 해병대원이고, 해군(해병대 포함) 부상자는 7,108명이다. 전쟁 중에 발생한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 전사자 175,801명, 부상자 554,202명 중에서 해병대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지만, 당시 연대급 이하의 규모로 참전했던 해병대의 참전용사 인원수를 고려하면 절대 적지 않은 숫자다. 이처럼 해병대의 전통은 선배 해병대원들이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전쟁에서 흘린 피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선배 해병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해병대의 보훈 역사를 살펴보자.

  6·25 전쟁 중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당시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들을 구제할 여건이 미비하였다. 조국을 지키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불구의 몸이 된 상이용사 중에는 정신마저 불구가 되어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이들이 많았다. 이에 해병대사령부 군목실장 박창번은 상이용사들을 정신적으로 위로하며 건전한 인격을 소유한 기술자로 만들어서 생활전선으로 내보내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박창번 군목실장은 해군부인회 회장 홍은혜 여사(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부인)로부터 40만 원을 지원받고 영락교회 교인 김낙규의 헌신적 노력으로 제1차 제대자 10명에게 기계 수선 기술을 강습하였다. 이를 시발점으로 1951년 11월 15일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장군의 지시에 따라 ‘해병대 상이군인기술교도소’가 설립되었다.


해병대상이군인기술교도소 제1기 수료 기념@ 『해군군종사』 제1집(1948~1965)

  1951년 12월 1일 제1기생 36명의 입소로 수업을 시작했다. 부산 역전에 있는 부산여객주식회사 건물 1개 동을 대여하여 초대 소장으로 박창번 군목실장이 취임했고, 김동선 군무원이 행정을 담당하였다. 김낙규, 김규찬, 최기영, 이수한 등이 무보수 강사로 활동하였고, 사진반, 프린트반, 영문타자반으로 구분하여 교육하였다. 박창번 소장이 내세운 교육 이념은 ‘경천애인, 기술연마, 자력갱생’이었다. 추후 상이군인기술교도소 훈(訓)이 된 생활신조는 ‘첫째, 기술보다 먼저 사람이 되자, 둘째, 몸은 불구자이나 마음조차 불구일 쏘냐, 셋째, 하면 된다,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였다. 해병대 상이군인기술교도소는 1952년 3월 31일 제1기 수료생 7명을 배출하였고, 1952년 11월 26일까지 3개 기수에 걸쳐서 137명을 배출하였다. 같은 해 12월 해군은 해병대 상이군인기술교도소를 해군 상이군인기술교도소로 기구를 확장하여 해군과 해병대의 상이군인들을 수용하도록 하였고, 해군 군목실에서 업무 통제를 하면서 해군부인회에서 운영비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해군상이군인기술교도소는 1955년 6월 20일 원호청(現 국가보훈부)으로 이관되었다. 6·25 전쟁기에 해병대가 창립하여 해군을 거쳐 원호청으로 이관한 상이군인기술교도소는 해병대를 비롯한 국군 상이용사들에게 자력갱생의 길을 열어 주는 보훈 기구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200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 60주년 기념식에서 해병대사령관 이홍희 중장은 훈장 수여식과 전사자명부전달식을 병행하였다. 훈장수여식은 그동안 훈장 수여 사실을 몰라 이를 미수령한 수훈자 5명을 해병대사령부에서 찾아내어 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대상자는 금성충무무공훈장 3명(김영열, 김태연, 故 고은중), 은성충무무공훈장 2명(故 김대용, 故 이재곤)으로 본인 또는 고인의 유가족에게 각각 훈장을 수여하였다. 전사자명부전달식은 625 전쟁, 베트남전, 대간첩작전 간 전사한 해병대 전사자 3,060명의 전사자 명부를 해병대사령부에서 제작해서 해병대 전우회에 전달한 것이다. 기념사에서 이홍희 해병대사령관은 “우리 해병대는 창설 이후 수많은 선배 해병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워진 명예로운 전통 60년의 역사를 이어가는 동시에, 미래 전장 환경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공지기동해병대 건설을 통해 60년 동안 베풀어주신 국민 여러분의 성원에 보답하겠다”라고 밝혔다. 또한 “앞으로도 우리 해병대는 호국충성 해병대로서 국가로부터 부여된 임무는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해 내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전달했다. 잊힌 무공수훈자를 찾아내서 훈장을 수여하고 전사자의 명부를 작성해서 전우회에 전달한 해병대 창설 60주년 기념행사는 위국헌신한 선배 해병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그들의 뜻을 기리는 보훈 행사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2016년 12월 16일 경기도 화성 해병대사령부에 세워진 충혼탑 개막식을 거행하였다. 2010년 해병대 연평도포격전으로 희생된 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가족 등이 낸 기부금으로 만들어진 충혼탑은 해병대 전사자 3,069명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해병대사령부 내에 설립하였으며, 좌우 벽에는 기부자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상훈 해병대사령관은 기념사에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과 헌신으로 무수한 신화를 창조해 온 선배 해병들의 유산을 해병대의 정신적 가치로 삼아 계승하는 것은 우리 해병들의 막중한 책임”이라고 강조하고, “충혼탑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이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불굴의 해병혼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사령관이 기념사에서 밝혔듯이 충혼탑 개막식은 전사자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보훈 행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2017년 2월 15일 ‘해병대사령부초대교회’가 국가등록문화재 제674호로 지정되었다. 이 교회는 해병대사령부가 제주 주둔기, 진해 주둔기, 부산의 용두산 주둔기를 거쳐 서울의 용산에 주둔하던 시절인 1959년 11월 14일 착공해서 1959년 12월 31일 준공한 콘크리트 건물의 교회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해병대의 역사이기도 한 해병대사령부초대교회에는 전투에 나서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적과 맞서 싸웠던 ‘해병대 DNA’를 엿볼 수 있는 뜻깊은 구조물이 있다. 예배당 전면 중앙의 커다란 십자가가 그것이다. 이 십자가는 1951년 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군에 맞서 혈전 끝에 탈환한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에서 자란 고로쇠나무로 만들어졌다. 7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도솔산 고지를 탈환했던 산악 대공방전으로 해병대 전투사에 길이 남는 작전 가운데 하나이다. 해병대사령부초대교회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해병대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도솔산에서 나무를 가져와 십자가를 만들었다. 해병대사령부초대교회에 있는 도솔산 고로쇠나무로 만든 십자가 구조물은 종교 구조물임과 동시에 호국보훈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병대사령부초대교회 고로쇠나무 십자가@www.ohmynews.com

  전술한 내용 이외에도 해병대가 전투를 수행했던 지역에는 전적비, 전승 기념비 등 참전용사들의 공적을 기리는 각종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기념일을 정하여 해병대사령부와 지역 자치단체가 함께 보훈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해병대는 이처럼 참전용사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그에 보답하기 위해 주기적 보훈 행사 개최 및 관련 기념물 제작 등을 정기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운 것은 그분들의 공적을 해병대사령부 차원에서 집대성하거나 참전용사들의 경험과 기억을 최대한 많이 모아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해병대사령부 차원에서 참전용사 중 생존자의 증언록을 작성하거나, 참전용사의 훈격별 훈·포장 수여자 명부를 유지하는 등 기록하여 기억하는 사업 추진의 필요성이다. 올해는 1953년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참전용사들은 이미 8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지만, 아직 생존해 계신 모든 분들을 찾아내어 그분들의 기억을 집대성한 기록으로 남기는 ‘6·25 전쟁 참전 해병용사 증언록(가칭)’을 만드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이며 해병대사령부 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는 기념사업이다.

  육군의 경우 관련 부서에서 훈·포장 수여자 통합 명부를 보유하고 있지만, 해병대사령부에서는 별도로 이를 관리하는 부서가 없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분들의 공훈 선양 사업으로 매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주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작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해병대원들의 경우에는 개인별 훈장 수여 여부 확인이 불가하여 관련 내용이 누락되고 있다. 보훈처가 보훈부로 승격된 즈음, 해병대사령부가 나서서 6·25 전쟁 참전으로 훈장 수여 대상이 된 모든 분들의 명부를 찾아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호국보훈을 위해 뜻깊은 일이 아닐까?


위 글은 (사)해병대전락연구소에서 발간하는 RIMS JOURNAL 제32호(2023.6.)에 보훈의 달 특집으로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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