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도 개정 헌법을 중심으로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제3·4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왕정체제, 제정체제, 공화주의 체제 등 수많은 정치체제를 경험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대혁명이 중단된 이후 프랑스 제1제정(1804-1814), 프랑스 부르봉 왕정복고(1814-1830), 프랑스 7월 왕정(1830-1848), 프랑스 제2공화국(1848-1852), 프랑스 제2제정(1852-1870),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 등의 정체를 거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제4공화국(1946-1958), 프랑스 제5공화국(1958-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은 공화국 체제를 도입하고자 했지만 단명으로 끝났으며, 제3공화국은 이원적 의원내각제를 설계한 헌법규범과 달리 현실적으로는 일원적 의원내각제를 완성시켰고 나아가 공화국적 국가형태를 확고히 했으나, 제도적 불균형으로 정부의 불안정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제3공화국 정치제도의 부정적 영향은 제4공화국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에 반해 국가적 위기 속에 등장한 제5공화국[프랑스 제5공화국의 대통령은 샤를 드골(1958-1969), 조르주 퐁피두(1969-1974),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1974-1981), 프랑수아 미테랑(1981-1995), 자크 시라크(1995-2007), 니콜라 사르코지(2007-2012), 프랑수아 올랑드(2012-2017)이다.]은 강력한 집행권을 통한 제도의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한 체제였지만, 헌법규범상 강력한 공화국 대통령의 권한으로 인해 제3·4 공화국과는 다른 의미의 권력 간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2008년 프랑스 국민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기본적 권리의 확대를 요구하는 변화된 시대 상황과 사회적 현실에 따라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공화국 대통령의 권력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 시민들의 권리를 그 내용과 절차에 있어서 확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헌정을 연구하기 위하여 정재황·한동훈의『2008년 프랑스 헌법개정에 관한 연구』(2008년, 한국법제연구원)와 강홍진의 “프랑스 제5공화국 24차 헌법개정안”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고 재정리하였다.] 따라서 2008년의 프랑스 제5공화국 24차 헌법 개정은 통치구조론 차원에서는 프랑스 헌정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입법권과 집행권간의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으며,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sy) 대통령은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을 개정하고자 2007년 7월 18일의 데크레를 통하여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대표로 구성된 하나의 심의위원회 즉, “제5공화국 제도의 현대화와 재균형을 위한 심의와 제안위원회(Comité de réflexion et de proposition sur la modernisation et le rééquilibrage des institution de la Ve République)를 구성하였고, 이 심의위원회에게 공화국 대통령인 자신에게 프랑스 제5공화국 제도의 현대화와 재균형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제출할 임무를 부여했다.] 그동안 헌법 규범적으로 등한시되었던 국민의 자유와 권리 부분을 직접적으로 헌법에 포함하고자 한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는 2008년 제24차 개정 헌법의 기본 방향에 관한 고찰을 통해 프랑스의 민주주의와 정치제도 발전과정에서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본 후, 프랑스 헌법이론이 대한민국 헌법에 미친 영향[프랑스 헌정이 대한민국 헌정에 미친 영향은 박인수의 “한국헌법상에서의 프랑스헌법의 영향,”『세계헌법연구』제14권 3호(2008년, 세계헌법학회 한국학회)에서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재정리하였다.]에 관한 고찰을 통해 대한민국의 헌정제도 발전을 위하여 프랑스 헌법의 어떠한 기본 정신과 개념을 준용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통령이 보다 민주적인 권력을 행사하도록 하고 대통령직을 가진 사람이 자리를 보존하는 것보다는 행동하도록 하며, 대다수의 민주국가에서의 대통령의 임기와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하였다. “누구도 2회 이상 연임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삽입하였다.
공화국에 필요한 규율과 행정조직의 안정화를 위해 “조직법(loi organique)은 장관들 및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membres)의 최대수를 제한한다”는 규정을 추가하였다.
투명하고 모범적인 공화국을 위하여 “조직법은...... 국민의 권익과 자유의 보장 및 사회·경제생활과 관련된 중요성을 고려하여 공화국 대통령이 양원의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의견 제시에 따라 임명권을 행사하는 직책들을 결정한다. 조직법은 동 위원회의 구성 및 의견 제시 방식을 결정한다”는 규정을 추가하였다. 이는 국민의 경제적·사회적 삶, 권리와 자유의 보장을 위해서 대통령의 임명절차는 의회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비상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 보다 명확한 규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헌법위원회의 제소가능성을 통하여 대통령의 예외적 권력행사의 실행 조건에 대한 검토를 위한 다음과 같은 조항을 추가하였다. “비상권한 발동기간이 30일이 지나면 하원의장, 상원의장, 60인의 하원의원 혹은 60인의 상원의원은 제1항에서 명시된 조건[프랑스 헌법 제16조 ①공화국의 제도·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제협약의 집행이 심각하고 직접적으로 위협받고, 헌법에 의한 공권력의 정상적 기능이 정지되는 경우를 의미한다.]들이 여전히 충족되었는지에 대한 평가를 헌법위원회에 제기할 수 있다. 헌법위원회는 최단기간 내에 의견을 공표한다. 헌법위원회는 비상권한이 발동된 후 60일이 되면 이와 같은 검토에 착수하며 동일한 조건으로 의견을 제시하며, 60일이 지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대통령은 특별사면권을 가진다. 그는 이 권한을 법률에 의해 구성되는 위원회의 의견 개진에 따라 행사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대통령의 사면권이 법률에 의해 정해지는 위원회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프랑스 특유의 역사적 상황으로 비롯된 교서권[대통령이나 국왕이 의회 또는 국민에게 보내는 정치상의 의견서를 교서(敎書)라고 한다.]은 오늘날 시대상황과 맞지 않으므로, “대통령은 이와 같은 목적으로 양원합동회의로 소집된 국회 또는 양원 중의 하나의 원에서 연설할 수 있다. 이 연설은 공화국 대통령의 불참하에 토론될 수 있으나, 표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규정을 삽입하였다.
대통령과 수상의 국방에 대한 권한에 대하여 헌법에 불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으므로, [개정 전 헌법 제15조는 “대통령은 군의 통수권자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음에 반하여, 헌법 제21조는 “... 수상은 국방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명확함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상은 국방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문장을 삭제하고 “수상은 국방에 관하여 헌법 제15조에 의거하여 채택된 결정을 집행한다”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1958년 제정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은 입법권의 희생과 권력 간의 불균형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헌법의 태도는 민주주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우선 법률의 통과와 정부활동에 대한 통제라는 의회의 임무를 엄숙하게 선언함으로써 의회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문으로 대체하였다. “의회는 법률을 표결하며, 정부의 행위를 통제한다. 의회는 하원과 상원을 포함한다. 하원의원들은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상원은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상원은 지방자치단체의 인구를 고려하여 공화국의 지방자치단체의 대표성을 보장한다. 재외프랑스인은 하원과 상원에서 대표된다.”
의회의 권한행사와 내부조직의 면에서 보다 많은 유연성을 주고자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가) 결의에 관한 권한
“의회는 의사규칙이 정하는 조건에 따라 결의를 의결할 수 있다”는 규정을 삽입함으로써, 의회에게 법률과 같이 모든 영역을 구속하는 것이 아닌 희망이나 관심의 표현을 나타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결의(résolution)를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자 하였다. 또한 결의에 관한 안의 제출과 이 안의 의사일정에 대한 문제, 결의에 관한 서명방식을 의사규칙(réglement)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나) 위원회(commission) 수의 문제
의회의 기능을 보다 활발하게 하고자 위원회의 수를 6개에서 8개로 확대하였다.
다) 의사일정(ordre de jour)의 문제
의회의 고유권한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의사일정을 정하는 문제의 주도권이 원칙적으로 정부가 아닌 의회로 이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하였다.
라) 합리화된 의회주의(parlementarisme rationalisé)의 수정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하는 보다 중요한 역할과 입법작업에 있어서 의회의 역할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다. 기존 헌법 제23조의 “법률안(texte)”은 “재정법률안 또는 사회보장자금조달법률안”으로 대체하고, “수상은 회기당 다른 하나의 법률안에 대해서도 이 절차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수상이 정치적 책임을 회부하는 것은 제정법률안과 사회보장자금조달법률안으로 국한하고자 하였다.
가) 법률안의 심의
의회가 법률안의 검토를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며, 정부제출법률안뿐만 아니라 의회제출법률안 역시 국사원(Conseil d'État)[국사원(國事院) 또는 국참사원(國參事院)으로 번역하며 프랑스의 최고행정법원인 동시에 정부의 법령안과 법령해석 자문기관이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긴급한 사안에 대한 시민의 기본권 보호기관이다.]에 의한 검토가 가능하도록 조항을 추가하였다.
나) 법률(loi)의 영역과 규칙(réglement)의 영역 간의 문제
법률의 영역과 입법의 영역 간의 분담을 잘 조정함으로써 입법과잉을 막고, 입법사항에 속하지 않는 경우 정부만 수리[수리(受理)란 제출한 소장이나 원서 따위의 문서를 받아서 처리함을 의미한다.] 거부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상원 의장과 하원 의장도 수리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하였다.
다) 프로그램법률(loi de programmation)의 영역 확대
국가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으로 한정하고 있는 프로그램법률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한계를 삭제하고 “프로그램법률은 국가활동의 목적을 정한다”로 함으로써 국방정책의 기본방침을 정하는 군사적 프로그램법률도 가능하게 되었다.
라) 법률안의 수정권 문제
수정권에 대한 사항을 조직법과 의회 규칙을 통하여 보다 명확하고 단순하게 하였다. 위원회에서 검토가 끝난 법률안은 본회의에서 단순한 비준만 받게 하였으며, 수정안에 대해서 정부가 가지는 우월적인 권한을 양원 의장 회의를 통하여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 권한은 조직법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양원 규칙이 정한 조건과 한도에 따라 본회의(séance)와 위원회에서 행사된다”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가) 회계감사원에 의한 보좌
의회에 의한 정부활동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회계감사원에 관한 규정을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다. “회계감사원은 의회와 정부가 재정법률의 실행과 사회보장 자금조달법률의 적용을 통제하는 것을 보좌한다. 회계감사원은 공공정책의 평가에 기여한다.”
나) 군사 부분에서 대통령의 권한 통제
전통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으로 여겨졌던 국제분야 특히 군사적 권한에 대한 의회의 통제를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를 규범화하고자 다음의 3개 항을 추가하였다. “정부는 해외에서의 군대의 개입을 최단기간 내에 의회에 통고한다. 이 통고는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표결로 이어지지 않는다. 군대개입의 기간이 6개월을 초과할 때에는 정부는 그 기간 연장의 허가를 의회에 요청한다. 상원에서 부결될 경우 정부는 하원에 군대개입의 연장에 대해 최종결정을 내리도록 요청할 수 있다. 6개월의 기간이 만료될 무렵 의회가 회기 중이 아닐 경우, 결정은 다음 회기에서 내려진다.”
다) 유럽정책에서의 의회의 역할 강화
유럽정책에서 의회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단지 법령(actes législatifs)만이 아니라 유럽공동체와 유럽연합의 모든 법령안(project와 proposition)을 의회에 이송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유럽연합 문제를 담당하는 위원회의 설치를 예정하고 있다.
가) 상원의 민주화와 재외 프랑스인의 대표성 강화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취약함을 가지고 있었던 상원을 개혁하고, 상원에서만 대표되는 재외프랑스인들의 지위를 하원으로 확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상원은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상원은 지방자치단체의 인구를 고려하여 공화국의 지방자치단체의 대표성을 보장한다. 재외 프랑스인은 하원과 상원에서 대표된다”라고 규정하였다.
나) 선거권의 평등과 보궐선거의 문제
하원 의원선거와 상원 선거에서의 선거권의 평등을 위한 독립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예정하였으며, 이전에 의원신분을 가졌던 각료들이 인위적인 보궐선거를 치를 필요 없이 다시 의원직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내용을 규정하였다.
다) 반대파 또는 소수파의 권리보장
의회에서 존재하는 반대파의 권리보장을 위한 규정을 제시하였으며, 정부를 지지하는 다수파에 속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 의회단체들에게 조사 또는 정보임무위원회 등의 활동을 보장하였다. 또한 재정과 의전에 관한 규칙에서 반대파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구체적인 보장을 인정하였다.
시민들의 청원이라는 수단으로 제소할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며, 환경문제에 대한 경제사회위원회의 개입을 예정하고 있다.
기존 헌법의 태도가 시민들의 권리보장에 미흡하다는 비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조항들을 추가하였다. “법원에 하나의 소송이 계속될 경우 이 헌법의 발효개시 이후에 공포된 법률조항이 이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와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시에는 조직법에 의해 정해진 조건과 제한에 따라 이 문제는 국사원 또는 대법원을 통하여 헌법위원회에 제소될 수 있다.” “... 위헌적이라고 선언되는 조항은 공포되거나 적용될 수 없다.... 위헌적이라고 선언되는 조항은 헌법위원회의 결정이 공표되는 날로부터 혹은 이 결정이 정하는 이후의 날자로부터 폐기된다. 헌법위원회는 이 조항이 산출한 효력들이 재검토될 수 있는 조건과 제한들을 결정한다.”
1973년 1월 3일 법률에 의해 도입된 “공화국조정관(Médiateur de la Répubique) 제도는 시민의 권리향상을 위해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나, 직접적인 제소를 할 수 없음으로 인한 제한사항은 그 실효성을 반감시켰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시민의 권리수호자를 창설함으로써 공공서비스 기능에 의해 피해를 받았다고 평가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소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하였으며, 조직법을 통하여 헌법에 규정된 내용을 보충하여 시민의 권리수호자에게 부여된 권한과 활동방식에 대하여 자세히 규정하도록 하였다.
기존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사법최고회의를 주재하는 권한을 가졌으며, 사법최고회의의 구성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헌법의 태도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통령이 사법최고회의 의장을 수행할 수 없도록 하고, 사법최고회의의 개방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등 사법최고회의의 조직과 권한을 현대 민주주의 이념에 보다 잘 부합되도록 하는 규정을 설치하였다.
최초의 성문화된 근대헌법은 1776년 제정된 미국 Virginia주 권리장전이라 할 수 있고 미국의 성문헌법도 1787년 제정되었으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헌법이 성문화되어야 한다는 성문헌법주의의 원리는 프랑스의 시에예스(E. J. Sieyés) 헌법이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시에예스는 “모든 국민이 자유롭고, 나아가 모든 국민이 자유로워야 하는 곳에서는 헌법과 관련해 제기되는 여러 가지 의견 충돌을 종식시킬 방법이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명사 회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 자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데, 전체 국민만이 헌법을 제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E. J. Sieyés, 박인수 해제,『E. J.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서울: 책세상, 2003), p.89.] 이러한 측면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성문주의 원리 수용은 프랑스 헌법이론을 모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과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규정을 둠으로써 국민주권주의 원리를 선언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주권주의는 대의제도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주권보유자로서의 국민의 개념을 이념적·추상적 단체로서의 국민으로 본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nation 주권이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거에서 보통·평등·자유선거제도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peuple 주권이론도 도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한민국의 국민주권주의의 유형은 nation 주권이론을 원칙으로 하면서 peuple 주권이론에 의해 보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nation(국민) 주권과 peuple(인민) 주권은 프랑스혁명당시의 주권개념으로서, nation 주권개념에 의하면 국민은 이념적 통일체로서 주권의 보유자에 불과할 뿐 행사자가 아니며, 대표가 주권을 행사하는 대의제를 지향하고 선거는 교양과 재산을 가진 자의 의무라고 하는 반면, peuple 주권개념에서의 국민은 유권적 시민의 총체로서 주권의 보유자이면서 주권의 행사자이고, 직접민주제를 지향하고 선거는 국민의 의무가 아닌 권리라는 주장이다.]
대한민국헌법은 9차례의 개정을 하는 동안 정부형태의 측면에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모두 경험한 바 있으나 권력분립의 측면에서는 일관되게 3권 분립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권력분립에 관한 이론적 연구는 영국의 로크와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등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권력분립이 근대헌법의 기본원리임을 선언한 것은 1789년 프랑스의 인권선언이 효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제16조는 “권리에 대한 보장성이 확보되지 아니하거나 권력의 분립이 규정되지 아니한 모든 사회는 헌법이 없는 사회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제16조는 권력분립 원리와 병행하여 기본권보장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 전문에서,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보완된 인권과......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2장 제10조-제39조를 통하여 기본권보장을 규정하고 있다.
헌법이 규율하는 영역은 원칙적으로 국가적 범위 내에서만 효력을 미치기는 하지만, 국내의 수많은 문제들이 국제관계를 떠나 논의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현대 헌법에 있어서는 국제관계에 관한 규정의 비중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일원으로 참가하고 주도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국제관계에서 발생하는 규범에 대한 헌법적 통제와 수용절차가 헌법의 영역에서 명시되는 것이 바람직할 입법태도라 할 것이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국제관계의 규범과 관련하여 제1장 총강편의 제6조[제6조 ①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②외국인은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 지위가 보장된다.]와 제3장 국회편의 제60조[제60조 ①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강화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 ②국회는 선전포고, 국군의 외국에의 파견 또는 외국군대의 대한민국 영역 안에서의 주류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만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국제관계에 관한 입헌주의와 법치주의의 적용이라는 점에서 다소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프랑스 헌법은 국제법 존중주의를 헌법에 수용하여 국제관계 규범의 시행 이전에 헌법과 국제규범 간의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조약의 국내법적 효력도 법률보다 상위적 효력을 부여하고 있으며, [제55조 적법하게 비준 또는 승인된 국제조약이나 국제협정은 각각 상대국에서도 시행된다는 유보 하에 공포하는 즉시 법률에 우선하는 효력을 가진다.] 특정 조약에 대하여는 국회의 비준 동의를 필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준 동의와 비준이 법률의 형식으로 제정되도록 하고 있다. [제53조 ①평화조약, 통상조약, 국제기구와 관련한 조약 또는 협정 그리고 국가의 재정부담·법률의 개정·개인의 신분변화·영토의 할양·교환·병합을 야기하는 조약 또는 협정은 법률에 의해서만 비준 또는 승인할 수 있다. ②위 국제조약 또는 국제협정은 비준 또는 승인되어야만 효력을 발생한다. ③관련 국민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영토의 어떠한 할양·교환·병합도 무효이다.] 프랑스 헌법에서는 국제규범에 대한 사전적 통제에 대하여 일반 법률에 대한 사전적 통제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수상·양원 중 어느 한 원의 의장·하원의원 60인 또는 상원의원 60인의 제소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심판하게 하며, 특정한 국제협약이 헌법에 위배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헌법재판소가 선언하면, 당해 국제협약의 비준이나 승인은 헌법 개정 이후에만 허용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제관계 규범에 대한 규범력 확보, 국제법 존중주의, 국제협약에 대한 국제적 신뢰성 증대, 한국헌법의 국제규범에 대한 법치주의 제고 등을 위하여 국제협약에 대한 사전적인 규범 통제제도의 도입과 조약에 대한 법률상위적 효력 부여 등과 같은 제도적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헌법 개정의 확정을 위한 절차로서의 국민투표제도와 국가 중요정책에 관한 국민투표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 개정 국민투표에 관하여 헌법은 시기·의결정족수·효력에 관하여 명확히 규정하고 있으나, 중요정책 국민투표에 관하여는 그 대상이 불명확하며 절차와 효력에 관한 헌법 규정이 없기 때문에 헌법적 논쟁이 종식되지 않고 있으며, 나아가 제도의 근본적 취지가 왜곡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투표제도를 헌법에서 수용한다면 국회입법을 보완하는 직접민주적 형태로서의 입법적 국민투표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랑스 헌법 제11조가 규정하고 있는 입법적 국민투표제도는 한국헌법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현대국가는 인터넷의 발전과 통신의 수월성 확보로 인한 국민 상호 간의 의견교환이 매우 자유로운 국가사회이므로, 특정한 경우 입법적 국민투표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국가의 난제 해결과 함께 새로운 국민통합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모멘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 의한 규범의 구조와 체계는 법치주의의 구현에 적합하지 아니한 면이 있으며, 더구나 국회의 지위를 행정부와 집권여당이 요구하는 법률의 신속한 규정을 위한 절차적 기관으로 기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반드시 법률로 제정해야만 하는 법률사항을 확보해야 하며, 법률에 의한 처분행위 자체가 가능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에 의하여 부득이 법률사항을 명령으로 위임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현행헌법에서와 같이 헌법 직접적 위임을 무제약적으로 행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국회가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특정한 법률사항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는 명시적 수권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간이 도과한 이후에는 일정한 절차에 의하여 법률로 복귀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법률과 명령의 구조와 체계의 문제점을 보완 개선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프랑스에서는 법률명령(les Ordonnances)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제38조에 의한 일반적 법률명령[프랑스 헌법 제38조 ①정부는 정책의 집행을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법률명령으로써 통상적으로 법률의 소관사항에 속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의회에 요구할 수 있다. ②법률명령은 국사원의 의견청취 후 국무회의에서 의결한다. 법률명령은 공포 즉시 발효된다. 다만, 수권법률(loi de d'habilitation)에서 정한 기간 내에 법률명령을 승인하는 법률안이 의회에 제출되지 아니하면 법률명령은 무효로 된다. 법률명령은 명시된 방식으로만 승인될 수 있다. ③본조 제1항의 기간이 만료되면 법률명령 중 법률의 소관사항에 속하는 내용은 법률에 의해서만 개정될 수 있다.]과 제47조 제3항에 의한 예산법률명령[프랑스 헌법 제47조 ③의회가 70일 이내에 의결하지 않으면, 재정법률안은 법률명령으로 발효될 수 있다.]이 있으며, 이외에도 제11조에 의한 국민투표로 수권법률을 제정하고 이를 통하여 법률명령을 발하는 국민투표 법률명령이 시행된 바 있다. 프랑스의 법률명령제도는 현실적인 행정입법의 필요성을 규범적으로 수용하되 엄격한 법적·정치적 통제와 절차적인 통제를 통하여, 국가작용 상호 간의 견제와 협력이 가능하도록 하며 국민의 기본권보장의 철저와 국가능률의 극대화를 도모하도록 기능하는 헌법적 장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법률명령제도의 도입을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국가 법규범의 능률성 제고, 그리고 더 나아가 법치주의의 실질화가 한 단계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