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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등병의 눈짓

군대의 추억

by Kenny

이십여 년 전 어느 봄볕이 따사롭던 날, 대대장으로 군에 복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우리 부대는 당시 해안경계작전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어느 날, 부대에 난리가 났다. 대대 본부로 전입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신병이 점심 식사 이후론 행방이 묘연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모든 간부들이 대대 본부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였다. 나도 4층 건물인 대대 통합생활관에서 비상계단을 오르며 그를 찾고 있었다.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주임원사였다. “대대장님, 찾았습니다. 호흡도 있고 맥박도 뛰는데, 의식을 잃었는지 눈을 뜨지 않습니다. 병원으로 빨리 후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안도의 숨을 쉬면서 건물 측면에 있는 비상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는데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에 타는 그 이등병이 보였다. 모두가 긴박하게 움직이던 그 순간, 그 녀석이 한쪽 눈을 살짝 뜨다가 위에서 내려다보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놀란듯한 표정을 짓더니 애절한 눈짓을 보냈다. 일단 마음이 놓였다. 아무런 이상이 없구나!


앰뷸런스는 떠나고 대대장실로 돌아와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 간 주임원사에게 전화가 왔다.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은 없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어서 수액을 투여하면서 안정을 취하게 하고 있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그쪽은 중대행정관에게 맡기고 부대로 복귀하세요.“


몇 시간 뒤에 그 이등병은 멀쩡하게 깨어났고 병원에서 부대로 복귀했다. 당시 상황을 파악해 보니 부대에 적응하느라 피곤했던 이등병이 따스한 봄볕 아래에서 깜빡 단잠이 들었었다. 잠에서 깰 무렵, 여기저기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그는 생각했다. “아! 큰일 났구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의식을 잃은 척해야겠다!” 이랬던 모양이다.


간부들에게 발견된 그는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에 타던 중 상황파악을 위해 한쪽 눈을 살짝 뜨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내막은 나만 알고 있는 일이다. 어떻게 후속조치를 할까? 선처해 줄까? 일벌백계(하나(一)를 벌(罰)하여 백(百) 명에게 경계(戒)심을 부여한다는 뜻)를 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이등병의 간절한 눈짓은 내가 했던 그와의 약속에 대한 착실한 이행이었다. 선처해 주리라고 예상되는 나에 대한 그의 믿음일지도 모른다. 우리 부대에 그가 처음 오던 날, 그와 면담을 하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군 생활하면서 어려움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고민하다가 엉뚱한 짓을 하지 말고 어떤 방법으로든 대대장에게 즉시 알려다오.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 그의 눈짓은 바로 그 약속에 대한 무언의 답변이며 신호였다. “대대장님, 제발 못 본 걸로 해주세요.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어서 이렇게 된 거예요.”


위계(僞計, 거짓으로 계책을 꾸밈 또는 그 계책)로 처벌할 수도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그의 중대를 방문해서 모든 중대원들이 있는 앞에서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ㅇㅇ은 불사신이야! 앞으로 우리 대대를 위해 큰 일을 할 거야!” 이등병이 부대를 위해 할 수 있는 큰일이 있으랴만 조금 과하게 격려를 했다.


그 이후로 일등병이 되고, 상병, 병장이 돼서 전역할 때까지 그는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부대에 잘 적응했고 선임이 돼서는 후배들을 잘 챙겨주었다. 지금도 가끔 당시 그 이등병의 눈짓이 떠오른다.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이등병 배역을 했던 배우 유승호의 사진을 대문에 걸고 보니, 녀석의 얼굴과 체형이 내가 좋아하는 유승호 배우를 닮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넘어갔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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