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
25년 전 UNMOGIP(United Nations Military Observer Group in India and Pakistan: 인도-파키스탄 유엔군감시단) 유엔군옵서버로서 인도-파키스탄 분쟁지역인 캐시미르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스웨덴 친구가 한국에 왔다. 판문점 일대에서 NNSC(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중립국감독위원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곧 임무기간이 종료되어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를 만나기 위해 판문점의 NNSC 캠프를 방문했다. 현역 시절 ROKAG(R.O.K. Military Advisory Group; 한국군연락단)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기에 생소한 곳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신축한 캠프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에 도착했다.
과거의 기억에 의하면 NNSC 캠프의 오찬 메뉴는 늘 기대 이상이었다. 셰프가 대단한 사람이란 소문도 있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식당에 먼저 도착해 있던 다른 멤버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친구의 말이 오늘의 메뉴는 한식이라고 했다. 한국인 친구가 온다고 한식을 준비한 줄 알았더니, 스위스와 스웨덴 군수장교가 번갈아가면서 메뉴를 선정하는데 그 메뉴가 마침 한식이었다고 한다. 스프링롤, 김치, 밥, 과일, 그리그 커다란 냉면 그릇이 보였다. 외국인들이 냉면을 주 메뉴로 한다고? 배식 차례가 되어 가보았더니 냉면이 아닌 라면이었다. 위에 새우가 여러 마리 놓여 있고, 계란 노른자 두 개가 보였다. 한식 오찬 주 메뉴는 라면이었다. 셰프가 만든 라면이라서 그런지 분식집의 라면에 비하면 훨씬 맛이 있었다.
친구에게 캐시미르의 UN군 초소에서 내가 끓여 줬던 라면이 기억나는지 물어보았다. 당연히 기억난다고 하면서, 라면에 오늘처럼 새우라든지 다른 것을 넣어서 조리하는 경우가 많은 지 물어보았다. 취향에 맞게 야채를 넣어도 되고, 심지어 스테이크 고기를 넣어 함께 먹어도 된다고 했다. 라면이 참 맛있다고 했더니, 친구가 셰프에게 직접 인사를 하면 좋을 듯하다고 했다. 식사 후 셰프에게 맛있는 오찬을 제공해 줘 고맙다며 기념품으로 가져간 자개볼펜을 주었다. 셰프가 오늘 오찬 메뉴가 스테이크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ROKAG 근무할 때 NNSC 행사에 참가해서 그 맛을 기억한다고 했더니 셰프가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다. 과거 NNSC 식당에 방문할 때마다 양식 코스요리를 먹었는데, 돌이켜보면 늘 특별한 행사가 있던 때였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면서 25년 전의 옛 추억을 소환했다. 당시 함께 했던 이태리 친구 얘기를 하기도 했다. 함께 찍은 사진을 25년 전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이태리 친구가 “big hug”를 댓글로 날리며 반응을 보였다. 과거 동료들 이야기, 아내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이야기꽃이 피니까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유쾌한 시간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유로피언의 라면 오찬! 스웨덴 친구는 오늘의 메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인 친구가 오는 데, 한식 메뉴라니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친구의 입장이 되어보니, 유명한 NNSC 캠프 오찬(양식 코스요리)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셰프에게 감사 인사를 했으니 친구는 한식 메뉴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올해로 65세가 된 그가 챙겨 준 선물꾸러미를 풀어보았다. 여러 종류의 스웨덴 초콜릿과 과자, 스웨덴군 야구캡과 주머니 칼과 휴대용 노트, 그리고 한여름에 먹는다는 다진 생선과 야채가 들어 있는 스웨덴 전통요리(정어리 양념?)가 든 작은 병, 소주잔 크기의 유리컵 세트 등이었다. 다과류는 손주들 주라고 잔뜩 넣은 모양이다. 나도 그에게 주려고 이것저것 많이 챙겨다 주었는데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모두 늙어가는 모양이다.
각설하고, 그날의 라면 오찬은 우리의 과도한 접대 문화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라면이 정찬 메뉴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