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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Apr 27. 2020

인류의 구원자와 비천한 그의 조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조상과 혈통은 중요하지 않다. 구원자인 그가 중요하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과 혈통에 대해서 "다윗 왕의 혈통" 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신약성경의 첫 구절인 마태복음 1장 1절에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없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뜻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작가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올해 성경을 꼼꼼히 읽다 보니 새롭게 발견한 부분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창조론적 관점에서 본 가축의 기원과 동식물의 차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브런치 글로 써서 올려놓았다. 두 번째가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한 조상에 대한 이야기다. 인류의 구원자요, 구세주요,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의 조상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하나님을 잘 섬긴 위대한 왕 다윗,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로 계보를 이루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성경을 꼼꼼하게 읽다 보면 그 계보에 하찮고 불쌍한 인물들이 제법 등장한다. 지금부터 그 비천한 예수의 조상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다만, 그 당시 이스라엘과 유대의 문화적 풍습과 전통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관점에서 본 것이므로 시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나 그는 아름다운 아내이자 이복 누이인 사라로 인해 자기가 위험한 상황에 빠질 것을 염려해서 사라가 아내라는 것을 숨기려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친삼촌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 사이에서 난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서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권리를 샀다. 또 야곱은 형 에서처럼 변장해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이 받아야 되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아들 엘의 미망인 다말과 잠자리를 함께 해서 베레스를 낳았다. 물론 며느리인 다말이 창녀로 변장해서 유다를 유혹 했지만 유다가 시아버지로서 아들의 미망인 다말이 후속을 잇도록 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유다의 형제 중 가장 훌륭한 인물인 요셉을 제치고 예수의 계보에 유다가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당시 근친결혼이 문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매우 복잡하게 얽힌 친족 간의 결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나타난다.


훌륭한 인물인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다. 라합이 여호수아가 보낸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자기 집에서 재워 주고 여리고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들을 찾을 때 숨겨서 보호했다고 하지만 그가 비천한 출신인 것은 사실이다. 보아스와 결혼한 룻의 며느리 나오미는 홀로 된 시어머니를 잘 봉양한 훌륭한 과부 며느리다. 그러나 나오미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나 돼지처럼 취급하던 미개한 모압 족속 출신이었다. 라합과 나오미가 행한 일은 칭송받을 만 하지만 그들은 본래 비천한 신분과 형편에 처해 있었다.


역사의 위대한 왕 솔로몬은 다윗 왕이,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죽게 만들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해서 낳은 아들이다. 아니다. 우리야가 죽기 전에 이미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임신을 하게 만들었고, 다윗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충신 우리야를 치열한 전쟁터의 사지에 몰아넣어 죽게 만들었다. 다윗 왕이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 하더라도 남의 아내, 그것도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전쟁에 임했던 부하 군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탐했고, 우리야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솔로몬은 낳았다. 이외에도 예수의 비천한 조상은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글을 쓰는 목적이 비천한 조상을 모두 찾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인물 찾기는 이 정도로 마무리한다.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조상이나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중요한 것이다. 그의 계보상에는 비천한 신분과 혈통의 조상들도 있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조상이나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 아니 나 자신이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조상이 있을지라도 내가 비천하면 비천한 것이요, 아무리 비천한 조상이 있을지라도 내가 훌륭하면 훌륭한 것이다. 훌륭한 조상과 혈통을 자랑하거나 비천한 조상과 혈통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것인가? 내가 오늘 밤, 아니 지금 당장 죽는다면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며 사는 인생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한 혈통에 담긴 더욱 심오한 의미는 "가장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다. 이하 세 개의 문단은 강만원의 "예수, 비천한 혈통: 예수의 존재의 역설과 가치의 반전"(NEWS M, 2014.12.27)에서 부분 발췌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조상들 중에 비천한 인물이 등장하는 특별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존귀한 예수가 지극히 비천한 자로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가난한 자'나 '버림받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보다 더 낮은 신분으로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예수가 마구간의 말 구유에서 태어난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인간 예수 그 자신이 지극히 낮은 자로 나지 않았다면, 세상의 낮고 비천한 자를 진정한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자신이 겸손하지 않으면 비천한 자들을 사랑할 수 없고,  종이 되지 않으면 결고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다. 진실한 사랑은 동정이 아니라 작고 낮은 자의 고통과 아픔을 알고 그들을 섬기는 온전한 희생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귀한 자다. 그러나 그의 존귀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통해 누리는 육신의 존귀가 아니라, 기꺼이 낮고 비천해져서 마침내 자기 목숨까지 아낌없이 주는 거룩한 영적 존귀다. 하나님과 본체인 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와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목숨까지 바치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예수는 우리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왔다.
예수가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복종했듯이 그리스도인은 허튼 교만과 허세를 버리고 겸손과 온유의 멍에를 맬 줄 아는 자가 돼야 한다. 세상에서 낮아져야 주 안에서 높아지고, 세상에서 겸손해야 주 안에서 존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역설의 진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낮아져야 높아지는 존재의 역설이며 가치의 반전이다. 세상의 낮고 비천한 자를 섬기면서 스스로 비천한 자가 되어야 진실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서 지극히 낮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가득히 소망을 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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