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들의 연대
지금 마당놀이 리허설 중이에요~
라며 남의집 5호 호스트 3인방과의 챗방에 사진이 몇장 올라온다. 예정된 남의집 일정은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리허설이라니? 하며 사진을 보니 왠걸. 그들은 남의집 5호에 모여 행사 동선과 큐시트를 짜고 있었다. 누가 보면 이벤트 대행사인 줄... 뭐 벌써부터. 게다가 리허설이 웬말인가?
"직업병이에요. 직업병. 저희가 오프라인행사 기획일을 업으로 하다보니." 아. 맞다. 기네. 전문가들이 벌리는 일이다보니 허투루 할 수 없었나 보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최은영 호스트 왈 "걍 우리 제대로 놀고 싶어서 이러는거니 내비둬요." 제대로 노는 게 뭐길래 큐시트까지 짜는걸까? 답사때처럼 경찰이 출동해야 끝나는 건가?;;;;
먼저 호스트 소개부터 제대로 하고 넘어가자. 남의집 5호 주인 최은영 호스트 (이하 최마당). 광고대행사에서 슈퍼우먼으로 일하다 돌연 사직서를 내고 지금은 인간 내면을 들여다 보는 사업을 준비 중이다. 망원동 마당집에 1년 정도 거주하며 동네 할머님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고 있다고 한다.
최마당의 대학후배 김지현님 (이하 김치) 그리고 김치의 회사 친구 조혜수님 (이하 조쉡). 둘은 동갑이라 친구로 지냈는데, 조쉡과 최마당이 친구가 (빠른 ** 년생의 비극으로) 되어버려 지금은 족보가 꼬였다 함. 둘다 방송국 마케터로 일하며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드디어 마당놀이가 열리는 날. 오픈 4시간 전. 3인방이 카톡으로 사진이 보냈는데 또한번 내 눈을 휘둥그레 만들었다. 마당을 좌식으로 세팅해 놓은거다. 마당에서 논다고 해서 응당 의자, 테이블을 놓고 식사하는 걸로 예상했건만, 이들은 또 한번 내 예상을 뛰어넘는 스케일을 선보였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마당놀이 이야기는 호스트 3인방의 기획에 맞춰서 3부로 구성해 본다. 얼쑤!
1부, 조쉡의 오마카세.
1부는 먹방이다. '서울에 사는 멕시코 여자'를 표방하는 조쉡의 스타일에 맞춰 라틴 느낌 물씬 풍기는 메뉴 구성으로 남의집을 찾은 낯선 이들의 마음을 열어보겠다 한다. 친해지는데는 먹는게 짱이지.
첫번째 손님이 입장했다. 찾아오기 쉽지 않은 집인데 용케도 알아서 찾아왔다. (남의집을 할 때마다 놀라게 되는 건 사람들의 뛰어난 공간 지각력. 어떻게든 찾아온다.) 이집이 맞나? 싶으며 쭈뼛거리고 있는 손님을 조쉡이 반갑게 맞이하고는 레몬 동동 물까지 따라준다. 아직까지는 어색함 충만한 공기가 마당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지만 이내 풀어지리.
뒤이어 나머지 손님들이 모두 남의집 5호를 찾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당놀이를 시작할 시간. 조쉡이 마이크를 잡고 오마카세 메뉴를 소개했다. 세비체, 감바스 등등 생소한 음식이 줄줄이 등장하고 '모든 식사의 끝은 탄수화물 폭탄이죠' 라며 솥밥과 순두부찌개로 마무리되는 메뉴였다. 엄마야!
오늘의 손님은 총 4명이다. 남의집 프로젝트 중 가장 소규모로 모집했다. 마당의 크기와 호스트를 포함한 총원을 감안한 규모였다. 모집시 뾰족한 엣지없이 마당에서 놀자는 이 프로젝트에 사람들이 선뜻 반응할까 싶었는데 마당에서 노는 것 자체가 뾰족한 모양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신청자가 정원을 넘겨서 호스트분들께서 함께할 손님들을 선발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한 손님은 자기소개 시간에 이번 프로젝트에 신청한 이유로 '놀이'라는 단어를 꼽았다. 특정한 지식 교류, 네트워킹 등등에 지쳐 있어서 그런지 '논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한다. 그러고 보니 논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주제가 어디있겠나? 싶었다. 잘놀고, 잘먹고. 남의집 프로젝트의 아이템으로 계속 이어갈 봄직한 테마다.
조쉡의 정성이 듬뿍 담긴 음식 덕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낯선 이들이 서로를 알아갔다. 덕분에 처음의 어색함도 어느정도 가셨다. 이기주 작가가 얘기한 '언어의 온도'로 놓고 보자면 조쉡의 음식이 마당에 모여 앉은 이들의 언어 온도를 적당하게 유지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 않은 낯선 이들의 대화.
2부, 김치의 미술상담
식사를 마치니 마당에 어둠이 깔렸다. 식기를 정리하고 모여 앉아 다같이 김치의 미술상담에 참여했다. 김치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며칠전 미술 심리상담사 자격증 1급을 땄다. 따끈따끈한 미술 상담사 신입이와 함께 서로의 내면을 돌아보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의식,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보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미술상담을 위해 미리 손님들께 준비물이 요청했었다. 각자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을 하나씩 가지고 오기. 첫번째 상담은 준비물로 챙겨온 각자의 물건을 소개하며 관련되서 본인에게 뜻깊었던 순간을 나누는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만난지 2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이들 앞에서 본인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진데, 이 순간만큼은 누구라도 술술술 본인 이야기를 꺼내게 되더라. 마당이 주는 영엄한 분위기와, 김치의 탁월한 상담 기술 덕분에 다들 뭔가에 홀린 듯 본인들의 속내를 털어 놓았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벽에 뚫린 구멍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이다.
첫번째 상담을 통해 서로의 과거를 공유했다면 다음 상담에선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심리상태를 나누었다. 테이블에 잡지를 몇권 올려두고는 현재 본인이 가장 갈망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잡지에서 골라 찢어다가 콜라주로 만들어 보는 시간. 나의 갈망을 이미지로 치환하는 작업도 의미있었지만 눈으로 보기만 하던 잡지를 손으로 찢는 경험이 신선했다.
다들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콜라주를 만들어갔다. 본인의 스토리에 더해 입체파 느낌마냥 멋들어지게 콜라주를 완성한 손님들의 손재주에 다들 감탄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는데 호스트 3인방에게 야유를 받았다. 여자 연예인 사진이 너무 크다며 속물이란다. 뭐, 어쩌란 말이냐. 이성경이 좋은 걸.
3부, 최마당의 스케치북
미술 상담을 통해 서로를 좀더 깊게 알게 되었고, 이번엔 음주가무로 흥을 돋굴 타이밍. 이름하야 최마당의 스케치북. 거실에 모여 앉아 최마당의 진행으로 각자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 하며 뜬금없게 받아들일 분들도 계실거다. 나역시 그랬다. 근데 이집 거실에서는 노래를 불러야 한단다. 집주인이 하라니 뭐. 게다가 집주인이 손수 선창을 한다. 아이유의 밤편지. 장난감(?) 마이크의 빵빵한 에코 이펙트와 유투브 반주가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잠시 감상하고 가시죠.
이어서 손님들의 노래가 이어졌다.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른 대근님. 키보드를 연주하며 유재하의 노래를 감미롭게 들려준 순섭님. 10CM의 노래를 (제목 까먹음;;) 생기발랄하게 불러준 지원님. 모두들 넘치는 끼와 감성으로 스케치북 현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화룡점정은 구진님의 달팽이 열창. 처음엔 본인 혼자 구슬피 부르더니 2절로 넘어가서는 떼창을 유도하며 본인은 중간중간 화음을 넣는다. 덕분에 거실에 모인 모든 이들이 달팽이를 합창하며 그의 화음을 깔깔거리며 음미했다. 화음 욕심이 이렇게 빛을 보는 것 역시 남의집이 베푸는 관용이렸다.
마당놀이의 대단원은 셀프톡. 최마당이 구상중인 자아 성찰 프로그램의 프로토타입을 따라서 자기를 표현하는 시간였다. 모니터에 무작위로 나오는 질문에 대한 본인의 답변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컨셉였는데, 질문의 어절 단위로 소리내어 이야기하고는 바로 답변을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예를 들어 '내 생애' '가장' '잊혀지지 않는 ' '장면은?' 이란 질문을 어절별로 띄어서 소리를 내고는 답변을 하는거다. 최마당의 주장에 따르면 이렇게 어절별로 나누어 소리내 발성하는 동안 뇌의 활동이 활발해져 무의식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를 마주할 수 있다고.
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를 지나고 있었다.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었으나 다음날의 일정도 있고, 졸음도 쏟아지고 해서 아쉽지만 자리를 정리했다. 오후 6시에 모였으니 장장 8시간동안 낯선 이들이 남의집에 모여서 먹고 논 셈이다. 지금까지 진행한 프로젝트 중 최장시간을 갱신했다.
다들 초면이고, 연령대도 다르며, 하는 일도 제각각인데 어떻게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고 놀 수 있었을까? 내가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과도 최근에 이렇게 놀았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가물가물하다. "지인보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 놓는게 더 쉬운 것 같아요." 라는 어느 손님의 말처럼 상대방이 나를 모른다, 나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본인을 무장해제시키는 게 아닐까? 그래서 본인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건지도.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에 '성격은 기득권'이란 문구가 나온다. 오늘 만난 이들 모두 그간 쉽사리 지인에게 드러내지 못했던 숨겨진 자아를 이 낯선 공간에서 끄집어 낸 것일 수도 있다. 낯선 이들 사이에선 어떠한 성격이던 기득권을 새롭게 쥘 수 있고, 덕분에 홀가분히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상대와의 교감에 적극적일 수 있었겠다 생각해 봤다. 여행길에 만난 동행자에게 열리던 마음처럼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호스트 3인방, 최마당/조쉡/김치에게 묻고 싶은 말이 생겼다. "남의집 프로젝트에 왜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호스팅을 했나요?" 이걸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들은 호스팅 준비를 위해 손님들이 지불한 입장료보다 더 많은 지출을 했다.) 본인들 경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닐진데,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낯선 이들을 집으로 들인 이유가 뭘까?
남의집 프로젝트를 기획한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이제는 남의집 프로젝트가 나의 통제 범위를 넘어섰다는 기분이 든다. 회를 거듭하며 새로운 호스트, 다양한 손님들과 어울리는 사이 프로젝트가 자가 증식했다고나 할까? 리처드 도킨슨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밈마냥 이제는 나없이 알아서 자기 복제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프로젝트, 나 혼자 감당하기엔 벅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