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쓴자, 글쓴자 그리고 그리는자.
남의집에는 크게 3부류의 낯선이들이 모인다. 호스트, 게스트 그리고 나같은 퍼실리에이터 (한국어로는 '촉진자'라고 하던데 어감이 영...) 호스트와 게스트야 어떤 역할인지 아실테고, 퍼실리에이터는 이 모임이 잘 굴러갈 수 있는 역할, 즉 진행을 담당한다. 첫 만남의 어색함을 덜어내고 빠른 시간안에 남의집에 모인 이들이 연대감을 갖게끔 하는 윤활유같은 존재.
남의집 초반에는 퍼실리에이터의 역할이 중요했었다. 호스트나 게스트 모두에게 생소한 성격의 모임이다 보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퍼실리에이터가 옆에서 자연스런 분위기 형성를 위한 넛지를 날려야했다. 물론 퍼실리에이터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남의집에 대한 레퍼런스가 쌓이고 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퍼실리에이터의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의집 마당놀이 때처럼 호스트가 행사 기획의 느낌으로다가 촘촘하게 기획해서 게스트를 모시기도 하고, 호스트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자연스레 게스트들을 이끌어 나가기도 한다. 남의집 독립출판이 후자에 해당했다.
박성환 호스트는 본인의 독립출판 경험담 공유를 마친 후 자연스레 게스트들 한분한분을 지목해 가며 그들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 냈다. '요새 어떤 글을 쓰고 계세요?', '글을 쓰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라고 그가 물으면 게스트들은 본인들의 글쓰기 이야기를 술술술 꺼내 놓는다.
이런 식의 진행은 내가 할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박성환 호스트가 스스로 이끌어 가는 것을 보며 '오호라~'하며 지켜봤다. 호스트가 전달했던 콘텐츠를 통해 이미 그와 공감 및 유대감이 형성된 게스트들이였기에 그들간에 오가는 질문과 대답은 Q&A가 아닌 대화에 가까웠다. 아니 대화였다. 1대 다수 혹은 이미 연대가 맺어진 다수 간의 대화. 여기에 제 3자인 내가 불쑥 끼어들어 '자~ 궁금하신 것들을 편하게 묻고 답해 주세요' 라고 진행하는 순간 그들간의 연대는 사뭇 낯설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으로 비유를 하자면 극작가 브레이트가 '낯설게 하기' 기법을 통해 관객들의 극중 몰입을 최소화하려는 것이 퍼실리에이터의 개입이라면, 반대로 관객이 극에 빠져들어 감정이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온전한 호스트의 남의집 진행인거다.
독립출판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모인 이들이기에 다들 글쓰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100일간 글쓰기' 라는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지웅, 희영, 주연님은 100일간 하루에 한편의 글을 쓰고 있었다. 사내 동아리 형식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인데 10명 안팎의 인원이 한조를 이루어 매일매일 하나의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한다. 분량은 자유. 지속가능한 글쓰기를 위한 장치가 흥미로웠는데,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각자 10만원씩을 모으고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천원씩 차감이 되고 있었다.
이들이 매일매일 작성한 글은 카페에 차곡차곡 쌓이며 댓글을 통해 다양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초면인 사람들이 모였기에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통해 서로를 알게되는 경험이 색달랐다고 한다. 박성환 호스트가 글을 통해 생각했던 각자의 인상을 묻자 실제로 보니 글과 완전 딴판인 경우, 실제랑 글이 일치하는 언행일치(?)의 케이스 등 다양했다고.
잡지 보그를 디자인하는 영주님의 경우, 책을 디자인하고 편집하는 일을 하다보니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어려워하고 막막해 하는 디자인과 편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참여했다고 한다. 박성환 호스트가 직접 디자인했던 표지에 대한 코멘트를 해주고, 이곳에 모인 이들끼리 독립출판물을 만들어 봐도 재밌겠다는 제안도 했다. 남의집으로 맺어진 인연으로 한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영주님의 아이디어는 곱씹을 수록 매력적였다. 글을 쓰는 이들과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하는 이들이 만났으니 못할 것도 없지!
어느덧 예정된 2시간이 지나 정식(?) 행사를 마무리 할 타이밍. 내가 끼어들어 물었다. "미리 공지드린대로 이후부터는 희망자에 한해 뒷풀이를 진행할게요. 스케줄 상 함께 하지 못하는 분들은 편하게 얘기해 주세요." 그러자 모든 게스트들이 표정으로 답했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뭐 그런 걸 묻소?
그렇게 전원이 뒷풀이에 참석하기로 했고, 뒷풀이 대열 정비를 위한 휴식타임에 박성환 호스트가 게스트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공개했다. 본인이 재밌게 보고, 게스트들에게 추천할 독립출판물들을 일일이 포장해서 (거기에 본인이 만든 독립서점 메타사이트 BI 스티커를 붙이는 센스까지!) 나눠 주었다.
기획단계에서 박성환 호스트가 본인의 이야기를 들으러 먼곳까지 돈을 내고 찾아와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책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내심 그가 쓴 '초보의 순간들'을 건네겠거니 짐작했었다. 한데 그가 직접 큐레이션한 독립출판물들을 고이 포장해서 나눠주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포장을 뜯고 기뻐하는 게스트들에게 일일이 그 독립출판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그를 보니 남의집 프로젝트를 통해서 본인의 경험담 뿐만 아니라 본인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독립출판 자체에 대해 널리 알리고 싶어하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한껏 훈훈해진 분위기에 치킨과 피자가 도착했다. 거기에 맥주까지! 식탁에 둘러 앉으니 아까보다 훨씬 편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확실히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유대감의 상관관계는 상당하다.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누군가 글쓰기의 원동력은 이별과 외로움이라는 개인사를 고백하자 다들 격하게 공감하며 각자 이별에 관한 글쓰기 경험을 꺼내 놓았다. 이를 글로 쓰면 책제목은 '자니?'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 불과 2시간 전에는 그렇게 어색했던 이들였는데 어느새 편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를 지켜보는 나 뿐만 아니라 참여한 모두들 신기해 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희안하게도 편하게 제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실제로 모임 후 후기를 받을 때, 강연과 뒷풀이를 분리해서 상대적으로 만족도가 높았던 것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 80%가 뒷풀이를 택했다. 이에 대한 두가지 해석.
해석1) 호스트로 넛지되어 비슷한 관심사로 모인 사람들간의 연대가 핵심가치로 작용. 거기에 남의집이라는 묘한 공간감이 분위기를 부스트업.
해석2) 서비스 경험이 기승전결을 띄고 있어 강연 때 무르익은 유대감이 뒷풀이에서 절정으로 폭발!
이 해석의 결론은 남의집이 전달하는 핵심가치에 대한 정의로 이어지는데, 앞으로 프로젝트를 지속해 나가며 밝혀야 할 중요한 과제다.
이렇게 7시간을 보냈다. 생면부지 남들과 낯선 남의집에 모여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한 게스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르는 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인 호스트의 경험은 어땠을까? 남의집 횟수가 늘어날 수록 쌓여가는 질문들이 늘어간다. 확실한 것은 호스트나 게스트의 만족도가 높다는 것! 현장에서의 체감과 만족도 조사를 통해서 얻은 확신이다.
남의집을 서비스로 놓고 보자면 상품에 대한 만족도는 검증되었다고 본다. 다음 과제는 이런 상품들이 다양하고 지속가능하게 생산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지속가능한 호스팅이 가능하려면 자발성을 가져야 하는데 어떤 동인으로 호스트가 남의집 문을 열게 만들런지 고민이다.
그날 모였던 분들이랑 함께 책을 만들어 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면 어때요?
행사를 마치고 며칠 뒤 영주님이 카톡으로 이렇게 전했다. 진짜로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