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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진 Jul 25. 2020

화가 오지호, 화가 고희동

고희동 가옥 보전에 얽힌 이야기

오지호(1906-1982) 화백은 독특한 향색(鄕色)의 인상파적 기법으로 자연과 햇빛을 그려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6년 화순에서 출생하여 1982년 작고하였으니 먼 시대의 사람이라는 느낌도 있으련만 아직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오화백의 유작들을 국립현대 미술관이나 여러 화랑, 그리고 미술 교과서 등에서 접할 수 있는 탓이리라. 또한 그가 작업했던 초가집이 아직 예향 광주의 무등산 자락에 남아 있다는 사실도 한몫을 했을 터이다.

오지호는 전주로 진학을 했다가 다시 서울의 휘문고보로 편입한다. 당시 휘문고보의 미술 교사는 우리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1886-1965)이었다. 


입담 좋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고희동은 제자인 오지호를 속으로 질시하였다고 한다. 그의 재주에 부러워하면서도 입밖에 내놓지 못하고 차별 평가하곤 했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그랬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화가로서는 제자인 오지호에 미치지 못하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미술에 전념했던 오지호에 비해 정치활동 등 외도를 한 탓에 나름의 작가 세계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오지호의 자화상>


최초의 서양화가로 칭해지면서도 잊혀 왔던 고희동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에 다가왔다. 2004년 갑자기  그가 살던 집이 문화계 뉴스의 중심에 서게 된다.  창덕궁의 서쪽 담장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붉은 벽돌담과 울창한 나무숲을 가진 (절충식) 한옥이 뉴스의 주인공이었다. 


폐가에 가깝던 이 집은 고희동이 32살 되던 해인 1918년에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직접 설계해 지은 것이라 한다. 고희동은 이 한-일 절충식 한옥에서 41년이나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잊혔던 고희동과 그의 집이 다시 회자된 까닭은 그 집이 헐리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탓이다. 2004년 고희동의 집을 사들인 기업체가 그 자리에 4층짜리 연구소를 짓겠다며 건축 허가원을 종로구청에 냈던 모양이다.


 종로구청은 북촌 한옥지구와 창덕궁의 경관을 망가뜨릴 우려가 있다며 허가원을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고희동의 <부채를 든 자화상>

건축 계획이 좌절되자 기업체와 건축가는 행정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적법하게 설계한 건물을 행정의 힘으로 막는 것은 불법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내용은 이 계획을 맡은 건축가가 전통 지역과 문화를 보존하는데 앞장서 온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 건축가는 강남에 있던 자신의 주거지를 서울의 북촌 한옥 지구를 지키기 위해 옮겨 와 귀감을 샀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고희동의 집을 두고 보전 상태가 나쁘고 한-일 절충식이라 보전가치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희동의 집과는 달리 광주가 아끼고 있는 오지호의 집은 평범한 초가집이다 (광주는 오지호의 처가 동네였다). 건축물로서 보전가치는 그리 높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예향 광주는 그가 살았던 주변을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보여주고자 했으며, 작가가 바라본 세상을 후세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란 오지호의 집처럼 그렇게 전승되고 체험되는 것임을 보여주려 했던 모양이다.  


고희동은 우수한 제자를 질시한 벌을 뒤늦게 받는 것일까? 제자의 제자 뻘쯤 되는 건축가에 의해 그의 존재와 그가 살았던 공간, 그리고 그가 바라보았던 세상이 송두리째 사라질 운명을 맞았었다. 복구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주장은커녕 헐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으니 고희동 가옥은 벌 치고는 매우 엄한 벌을 받았던 셈이다. 

건축가가 내세운 대로 법 논리가 문화 논리보다 우선할 수 있다. 아니 그동안은 법 논리가 우선 해왔다. 그 법 논리 우선 탓에 우리는 참으로 많은 문화 공간, 유산, 기억 등을 잃어야 했다. 덕수궁이 망가지고, 궁터가 아파트 건설에 짓밟히고, 유적지가 도로로 몸살을 앓고... 


그런 사이에 우리는 늘 새로움으로만 치장된 켜 없는 얄팍한 문화만을 경험하고 있다. 남도의 오지호와 서울의 고희동이 만나 묘한 인연을 맺었고, 제자는 스승과는 다른 화풍을 일구었으며, 각자 근거로 삼았던 공간이 광주와 서울 창덕궁 근방에 오롯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쯤은 누구든 입에 올릴 수 있도록 옛 것을 남겨두는 문화적 지혜와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문화연대>와 문화재 보호단체 등이 보전을 주장하고 나섰고 다행히 종로구청이 고희동 가옥을 매입 복원한다. 2012년부터 전시관으로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가옥을 허물고 연구소를 지으려던 그 유명 건축가도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 고희동의 집이 남게 되었으니 저 세상에서도 두런두런 그 집 이야기를 세 분이서 재밌게 나누고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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