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레코드사의 전속가수 제도
한국 대중음악사 연구와 유성기 음반 연구는 1929년을 중요한 기점으로 잡고 있다. <한국 유성기 음반 총목록> (1998)에서는 1929년을 ‘유성기 음반 전성기’의 시작 연도로 파악한다. 가요와 음반 연구자인 박찬호도 유성기 음반 시대의 한국 가요사를 나누면서 1929-1943년을 한 경향의 시기로 묶는다 (박찬호, 2000).
한국 대중예술문화연구원이 펴낸 <한국 대중가요사 (1886-1945)>에서 정리한 ‘음악에 관한 주요 연표’에도 1929년은 중요한 시작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1929년을 기점으로 유성 음반의 대중음악 감상이 붐을 이루자 음반사들은 가수 찾기에 나선다.
최초의 직업 가수로는 채규엽을 손꼽는데 그가 가수로 나서면서 <콜럼비아 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는 시기도 그즈음이다. 그는 최초의 직업 가수이면서,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였던 셈이다. 이때부터 '전속'이라는 개념이 대중음악계에 뿌리를 내린다.
이 제도는 외래종이긴 하지만 이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도로 자리 잡는다. 채규엽 이후의 가수, 창작자들도 레코드사와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답습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중음악 생산 시스템이 변화고 그에 따라 전속이 갖는 의미도 바뀌긴 했다.
그러나 가수나 창작자가 어딘가에 전속이 된다는 것은 실력을 인정받고, 그에 합당하는 대우를 받는 것을 의미했다. 이 개념은 곧 대중음악인의 성공을 예견하거나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초기 전속 제도는 일본 레코드 회사들에 의해 도입되었으므로 일본의 전속 제도가 이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일본과는 다른 가수 선발방식, 음반 취입 방식, 활동 방식을 지녔으므로 전속 제도 또한 특유의 방식으로 변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초기 음반의 시대와 함께 온 전속 제도, 그리고 이후의 변화를 추적하는 일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 대중음악 시스템의 역사를 추적하는데 요긴한 일이다.
한국 대중예술문화연구원의 <한국 대중가요사>에서는 전속 제도를 1926년부터 각 레코드사가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p. 137). 그에 따르면 “각 회사마다 작사료나 작곡료, 그리고 전속작가나 가수들에 대한 보수는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보편적으로 작사료 1편당 10원, 작곡료 10원이고, 편곡료는 별도였다. 중견 가수일 경우 전속료가 2년에 80-90원 정도였고, 대개 전속기간은 2년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전속 예술가, 전속 가수라는 명칭이 일반에게도 익숙해져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하는 시기는 1933년쯤이다. 이때 언론보도들은 “전속가수를 모집, 컬럼비아 회사에서” “폴리돌 전속가수 음악 실연의 밤, 구일 공회당에서” “오케 레코드 회사 전속 예술가 이난영, 임방울....(하략)” 등의 기사를 싣는다.
1934년 <삼천리> 9월호에서는 인기가수 투표 결과를 싣는다. 그 기사에는 레코드 발매를 한 가수를 “레코드 가수”라 칭하며 그들이 전속되어 있는 레코드사를 동시에 밝히고 있다.
1930년대 음반이 대중음악 감상의 주요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가수는 레코드사에 전속이 되고, 레코드사의 전속가수는 곧 실력과 인기를 지닌 가수라는 공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레코드사의 전속가수는 가수 중에서도 성공한 가수의 직함이었던 셈이다.
초기 레코드사는 전속의 대상을 찾기 위해 여러 형태의 선발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선발제도는 전속할 가수를 뽑는 제도이기도 했지만 이미 전속이 된 이들을 알리는 공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 가수라는 제도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속이라는 제도가 욕망의 상징체계로도 작동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초로 전속가수라는 개념이 대중적인 신문을 통해 알려진 해는 1933년이다. 기사를 통해 그즈음 가수로 전속되는 것 자체가 문화적 사건이었고, 특정 지역의 자랑거리가 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진남포) 지난 8월 본사 진남포 지국 후원의 ”콩쿨“ 대회에 번외로 출연하야 만당관중을 놀래게 한 일소녀가 있었다. 이것이 동기로 ‘포리도-루’ 레코-트 회사에서 알게 된 그 소녀는 전기 레코-트 회사의 전속가수가 되야 근근 레코-트 취입차로 경성을 향하야 떠나리라고 한다. 이 소녀인즉 진남포 후포리 김응권씨 따님 김남홍(16) 양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안엇든 전연 소인인만큼 레코-트 팬들은 큰 흥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7. 9. 23)
위의 전속가수 기사는 음반회사가 전속가수 제도를 홍보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전속가수가 곧 가수로서의 최고 지위라는 점도 알려주고 있다. 전속가수 제도가 널리 알려지는데 이상과 같이 신문매체의 힘이 크기도 했지만 신문매체도 자신의 문화적 역량을 넓히기 위해 가수 선발 대회를 활용하기도 했다.
가수 선발대회를 신문매체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대중음악과 라디오, 텔레비전의 관계 즉 대중매체를 낀 대중음악의 전통은 신문중심의 매체 시대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대중음악 사건은 언제나 대중매체적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전속가수를 선발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형태의 가수 선발대회, 콩쿠르대회가 열린다. 앞서 보았듯이 신문사나 악기사와 레코드사가 제휴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형태가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자 레코드사에서는 전속가수와 악단을 이끌고 지방순회공연을 나서는 더 적극적인 공연을 벌인다. 레코드를 홍보하고, 가수를 알리는데 유리할 뿐 아니라 이것 자체가 흥행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탓이다.
악극단이 본격적으로 노래, 코미디, 춤 등을 갖춘 본격적인 쇼로 자리 잡은 시기는 레코드사들이 지방순회를 꾀하던 때다. 이후로 레코드사들이 벌이던 전속가수 선발대회는 점차 새로운 공연 형태로 변해 간다. 요즘으로 말하면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오케> 레코드사가 벌인 1937년의 <오케 연주회>, 그로부터 발전된 형태인 1940년의 <조선악극단>이 그 예다.
“새해를 마지하는 첫 봄에 한날을 택하야 대중음악에 명랑선을 독점한 오케 전속예술가를 총동원시켜 오는 12일 밤에 매일신보 영등포 지국 주최와 본보 영등포 지국 후원으로 오케 대연주회를 개최하는 바 그 날 밤 출연할 악사는 조선악단에 일흠난 오케 전속가수들이라 하며 관현악, 유행가, 째쓰, 무용, 난센스, 째쓰뺀드 등으로 만흔 이채를 보이리라고 하며 장소는 연예관이라는데 특히 본보 독자에게는 할인권을 배부하야 독자 우대를 하기로 하엿다 하며 이제부터 인기를 집중하는 중 만흔 관연 잇기를 바라는 바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8년 1월 10일).
콩쿠르대회를 넘어서는 공연으로 바뀌면서 악극단이 형성된다. <빅타 연주회> <빅타 가극단> <태평 연주회> <콜롬비아 악극단> 등이 <오케 연주회> 뒤를 이었다. 이후 성보 극장, 약초 극장도 <성보 악극단> <약초 가극단>을 구성했는데 이들도 레코드사의 악극단과 유사한 조직과 운영을 취했다 (반재식, 2000, p. 280).
악극단도 전속 제도를 두고 있었지만 레코드사의 그것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았고 레코드사를 끼지 못한 악극단들은 보상체제를 갖추지 못해 큰 구속력을 지니진 못했다.
해방 전부터 존재하던 이 같은 전속가수 제도는 1) 레코드 회사가 대중음악의 중심이 되어 2) 가수를 선발하고 육성해 음반을 통해 널리 인기를 끌고 그에 따른 보상을 전하는 대중음악 시스템이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며 이는 이후 변형되어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시스템인 악극단에서도 채용되고 있었다.
대중음악계에서 ‘전속’이라는 제도는 계약방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수나 작가의 지위를 드러내 주는 일종의 상징체 제이 기도 했다. 생의 소원을 레코드사 전속가수로 삼는 가수 지망생을 꾀어 돈을 갈취하는 사건이 등장하기까지 했으니(<동아일보>, 1939년 8월 29일, ‘가수 지망생 처녀를 농락 코 편금’) ‘전속’은 그야말로 당시 연예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동경하고, 높이 평가하는 그런 제도이며 용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