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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진 Jul 28. 2020

도쿠토미 소호의 망령

언론개혁은 축령의 작업

도쿠토미의 말년의 모습

청와대를 오른쪽으로 끼고 자하문 터널 쪽으로 오르다 보면 한 때 백운장이라 불리는 곳이 나온다. 지금은 그 자리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곳엔 작소거(鵲巢居)란 이름의 큰 집이 있었다. 


멀리 총독부 건물이 바라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1910년 한일합방부터 10 여 년간 조선의 언론을 좌우했던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였다. 일본의 <국민신문>을 소유 운영하던 도쿠토미는 당시 일본 수상이던 가쓰라의 추천으로 일본의 식민경영을 훈수하게 된다. 


한 해에 3-4주간 경성에 머물며 효율적 식민경영을 위한 언론통제, 이데올로기 전파를 거들었다. 조선의 자연을 사랑했고, 조선이 일본과 하나됨은 이미 하늘이 정한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고 설파한 그가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던 작소거엔 그를 따르는 조선 지식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도쿠토미는 언론인으로 알려 있지만 실상은 정치 사상가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운영했던 <국민신문>은 일본의 식민 확장을 촉구했고, 천황 중심의 제국 건설을 노래했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당시 지식인들이 <국민신문>과 계열 잡지에 모여들었다. 명성황후를 살해하는데 동참했던 기쿠치 겐조도 <국민신문>에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다. 


기쿠치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한성신보> 주필, 사장을 맡았던 것도 도쿠토미에서 배운 언론관 탓이 아니었을까.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경성신문>의 사장들도 <국민신문>에서 주요 간부를 지녔던 사람들이었다. 


그 만큼 도쿠토미가 설파했던 ‘일본의 장래’(이는 그가 집필했던 책 제목이기도 하다)는 일본 지식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를 따를 만큼 일관된 내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등이 조선의 미래를 일본과 함께 점치게 된 데에는 도쿠토미의 영향력이 있었을 정도였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매일신보>사옥 (현 프레스센터 자리)

구마모토 현 출신인 도쿠토미는 일본의 대륙 진출을 노래하던 국권당(國權黨)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런 만큼 일본이 조선을 합병해 대륙진출의 기반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데 열심이었다. 


이토우 히로부미가 조선을 보호령으로 두려 하는데 반대하며 합병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 이전에도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독전했을 만큼 대륙진출을 주장해왔다. 일본이 유럽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힘을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합방을 하는 것은 서구와 나란히 하는 일이니 그를 침탈이랄 수도 없고,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흡수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서구를 넘어서기 위한 동양인들 간의 협력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같은 주장을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 조선의 언론을 정리해 효율적으로 선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그는 한일합방 전후에 조선 통감, 총독에게 전했다. 


합방을 전후해 그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조선 식민 경영 전면에 나선다. 그는 우선 조선의 언론을 장악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당시 남아 있던 <대한매일신보>와 일본인 경영의 민간신문을 모두 구매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총독부의 도움을 받는 기관지만을 둘 것을 제안했다. 일종의 언론 통폐합을 주장한 셈이다. 그리하여 <경성일보>와 그 산하에 한글판 <매일신보>를 두고 정보, 여론을 독점하고자 했다. 


도쿠토미는 <경성일보>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그가 운영하던 <국민신문>의 간부들을 사장 자리에 앉힌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직접 기고해 한일합방의 정당성과 역사성을 설파했다. 


당대 최고 문필가로 알려진 그는 연재된 글을 통해 조선 내의 일본 관리, 조선 지식인들을 교육하고자 했다. <도쿠토미 소호>라는 책을 집필한 정일성이 그를 일본군국주의의 괴벨스라고 부른 까닭도 거기에 있다. 


테라우치 총독의 강압정치에 도쿠토미는 한일합방에 관한 선전을 보태어 합방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했다. 


도쿠토미의 선전정책, 언론관은 일본 내부에서조차 반발할 정도로 철저하고 악랄한 것이었다. 조선에 특파되어 있던 일본인 기자들도 언론통제에 대해 반기를 들곤 했다. 


일본신문의 조선 내 반입조차 통제하고 있었다. 도쿠토미는 강압적 여론정책과 언론의 통제를 통한 여론 조작을 병행하는 합성전략을 행하고 있었다. 헌병대 사령관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를 조선 내 언론정책의 최고 공헌자로 도쿠토미는 기억하고 있었을 만큼 무단정치 아래서 언론정책을 폈었다. 


심지어 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가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여론을 만드는 온상이 되고 있다며 그를 축소할 것을 테라우치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실제 선교사 운영학교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교육과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본 근대론을 도쿠토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선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이제 조선의 언론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며 조선을 떠났던 도쿠토미는 이후 일본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자 했다. 특히 천황중심의 일본 재편을 강조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A급 전범으로 규정될 만큼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확장에 열심이었다. 


정치와 군부 그리고 언론을 엮으며 일본 대중의 여론을 이끌기에 힘썼다. 일본으로 떠난 이후에도 조선을 수시로 방문하였고, 그럴 때 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 일본을 조선이 십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은 조선이 새롭게 살기 위한 전제조건이라 설득했다. 


도쿠토미는 이광수 등에 신문 지면을 제공해 조선의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복화술을 펼쳤다. 이광수는 창씨 개명 후 ‘비로소 당신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신을 보낼 정도로 도쿠토미의 사상에 젖어 있었다. 


조선 내 언론, 선전 정책이 마침내 빛을 보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도쿠토미는 그 편지를 읽지 않았을까. (아래 사진은 춘원 이광수의 창씨개명을 보도한 신문기사)


도쿠토미가 조선의 언론을 <경성일보> 중심으로 통폐합하라고 주문하고, 그가 실제 언론정책, 선전정책을 펴기 위해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딘 지 곧 110년이 된다. 


청운동을 거쳐서 황토현을 지나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에 있던 <경성일보><매일신보>까지 다니던 그의 발자국은 백운장 근처 작소거에 남은 기와장 신세처럼 지워진 지 오래되었다. 


황토현은 콘크리트 광장 아래로 영원히 숨어버렸고, 신문사 자리도 서울시청 공사로 조금도 그 형태를 짐작해볼 수 없게 되었다. 1940년에 그를 흠모하던 조선인들이 남겼다던 비석도 찾을 길이 없다. 


경술국치 110년을 맞았지만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조차 많지 않다. 한국언론사 연구자들 말고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조차 드물 정도다.   


역사의 반복이랄까, 망령의 귀환이랄까 그런 느낌이 목덜미를 스멀스멀 타고 오른다. 그의 망령이 광화문 앞을 배회한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아직도 언론을 제 이익을 위한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언론사주를 대하면서 도쿠토미의 망령이 배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론을 통폐합하며, 심복을 일본에서 데려다 앉히고,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때로는 조선인들의 입을 강압적으로 틀어막던 그 망령. 


제대로 축령한 적이 없으니 망령이 배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론이 변해야 한다고, 변화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히며 공분을 끌어낸 지가 긴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토쿠토미의 망령 아래서 그를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다. 부끄럽다. 축령하지 못한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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