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데이트

by 최용주

1986년 1월, 결혼 5개월 전 아내와 데이트하던 별로 춥지 않은 겨울이다.

대학로에서 그녀를 만나 관악산을 등반하기로 하고 서울대 입구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우리는 겨울 등산하기 알맞은 든든한 잠바를 입고 간편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서울대 정문 옆 관악산 입구에 들어설 즈음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등산을 시작하기에는 다소 늦은 오후라서 그런지 그리 많지 않은 등산객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걷고 있다.

“어 눈이 얼굴에 스치네.” 산 입구에서 나의 왼팔에 팔짱을 낀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네. 별로 많이 올 것 같지는 않은데...”

오늘은 그녀와의 동행이라 험하지 않은 코스인 삼막사를 거쳐 안양유원지로 빠지는 코스로 잡았다.

손잡고서 걷다가 좁은 길이 나오면 내가 앞장서서 걷고, 가파른 오르막길은 먼저 올라가서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느끼면서 잡아 이끌어 준다. 그녀와 즐거운 데이트를 즐기는 등산인지라 최대한 그녀를 위한 등산을 해야 한다. 산의 중턱의 이르자 한 두 송이 내리던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금세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왔는데 난감하다.

조금 전까지 초록과, 갈색이었던 주변이 하얗게 변하여 온 세상이 너무 신비롭게 보인다.

하얀 눈은 우리 앞에서는 한가롭게 위에서 아래 수직으로 움직이더니, 굴곡진 산기슭에서는 바람이 몰아쳐 눈이 위로 솟구치는 경이로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얼굴에 부딪혀오는 눈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입을 벌리니, 혀에서 사르르 녹는 눈은 시원 맹맹하게 느껴진다.

내리는 눈이 맛난 아이스크림이라면 어땠을까?

중간 산등선에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하얀 세상을 보면서 껴안고 입맞춤을 한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용주 씨, 그만 돌아갈까요?”한다.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정상을 밟아야지.”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끈다. (그녀는 나의 굳건한 정상 정복의 의지를 보고서 ‘믿을만한 남자’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후에 말하였다.)

거의 정상에 다 왔는데 눈이 무릎까지 빠지며, 등산로는 흰 눈으로 가려져 사라졌다.

다행히 사람들의 안내로 정상에 위치한 절·삼막사를 찾아갔다.

등산로가 눈으로 덮여 내려가는 길을 찾기가 난감하여 걱정하고 있는 차에 삼막사에서 눈을 피하고 있던 등산객 중 한 사람이 안양으로 내려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대로 가니 쉽게 안양유원지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나는 어설프게 노래를 시작하였다.

“하얀 꽃 이~이파리 눈송이처럼 나알리네” 그녀는 완벽한 박자와 화음으로 노래를 부르니, 나는 따라 부르기만 하면 된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그녀의 머리에 고드름이 생기고 우리들의 옷은 젖었으며 운동화 속으로 눈이 들어가 녹으니 발이 시리기 시작하였다.


3~40분쯤 내려가니 유원지 입구에 공중 사우나가 눈에 띈다.

“우리 저 사우나에 가서 몸을 씻고 좀 녹이고 갈까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우나에 들어갈 것을 제안한다.

“아니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떻게 목욕하러 가요?”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란 듯이 나를 매섭게 올려다본다.

남자는 사우나에서 1회용 면도기와 치약·칫솔을 구매하고 수건은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비치되어있기에 어려움 없이 사우나를 할 수 있어 제안하였는데, 여자들은, 특히 그녀는, 각종의 세제와 화장품을 구비하여만 목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어설픈 제안을 퇴짜 맞은 후 한 5분쯤 내려가니 앞에 XX다방이라는 네온사인 간판이 보인다.

“저 다방에 가서 옷도 말리고 몸 좀 녹이고 가는 것이 어떨까요?”

내 제안을 딱지 놓았던 그녀는 약간 미안한 기색으로 역제안을 한다.

2층 건물의 지하에 있는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부딪치면서, 석유냄새가 코에 와닿는다.

안에는 두 여자가 커다란 석유난로 가까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를 보더니 이야기를 중단하고, “어서 오세요.” 거의 동시에 외친다.

“어머, 두 분 온몸이 다 젖으셨네.” “어휴, 이 눈 속에서 등산 다녀오셨구나! 이리 난로 옆으로 오세요.”

우리의 몸꼴을 보고 두 여자는 자기들이 앉아있던 난로 옆의 자리로 안내한다.

두 여자의 친절한 응대에 잘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초·중반으로 약간은 후덕해 보이며 무테의 안경을 쓴 여자는 발목까지 내려온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이 하얗고 약간은 깍쟁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는 무릎 위를 상당 부분 드러내 보이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두 여자는 화장을 매우 진하게 하고 있었지만, 외모나 입은 복장으로 누가 주인이고 종업원인지 분별이 되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젖은 머리, 발, 옷, 신발 그리고 추위에 쪼그라진 우리의 맘을 녹이는 시간은 1시간을 훨씬 넘어버렸다.

넉넉해진 몸과 마음으로 다방을 나와 안양유원지에서 38번의 버스를 타고 우리들의 데이트 본거지인 대학로에 왔다.

통닭과 생맥주로 저녁을 때운 후 그녀의 기숙사로 바래다준다.

도중에 꽃가게에서 빨간 장미를 한 다발 사서 그녀의 품에 안겨주니 엄청 행복해한다.

어둑한 곳에서 작별의 뽀뽀 후 그녀가 하얀 눈길을 따라 기숙사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는 서대문 로터리 근방에 있는 집으로 향하였다.


아~~~, 아련한 추억 속의 관악산의 하얀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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