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숙어에 “I am all thumbs.”란 말이 있다.
영어의 thumb는 엄지손가락을 말하며, 손가락 중에서 가장 솜씨를 부릴 수 없는 손가락이 엄지손가락이다.
나는 모든 것이 엄지손가락이라 하니 ‘나는 엄청 손재주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나는 같은 또래끼리 비교될 수 있는 노래, 유희, 미술, 운동 등 누구보다도 내가 잘한다는 것을 못 느끼고 중학 시절까지 보냈다.
나는 8남매 중 다섯째이었기에 항상 비교 대상이 되는 형제들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 기타 치며 노래하는 포크 송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트윈폴리오의 송창식, 윤형주와 김세환 등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너무 멋있게 보여 나도 기타를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기타 교본을 사다가 연습을 하였다.
C, Cm, C7, D, Dm, D7… 와 같은 기타 코드를 배우며, 나름대로 연습을 열심히 하였다.
몇 달을 열심히 단련하여 대중가요 하나를 반주하면서 부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같이 배우기 시작한 바로 윗형은 가요 책을 보면서 자유자재로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진도 차이가 나도 한참 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부모님과 형제들은 “똑같이 배웠는데 용철이는 저렇게 잘하는데 용주 너는 왜 이래?”하는 자존심 상하는 소리를 하였다.
나는 기타 배우기를 포기하였다.
노래는 둘째 형과 바로 윗형이 잘 불렀다.
그들이 노래 솜씨가 나보다 한결 낫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한 바였다.
나는 그들하고 비교되는 것이 싫어 노래도 포기하였다.
어린 시절 골목에서 가장 많이 하는 놀이는 고무공 차기였다.
2살 어린 동생과 공차기를 많이 하였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뛰어난 동생에게 실력 비교가 안 된다.
후에 축구선수가 된 동생은 나를 가지고 놀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주변에서 형이 동생보다 못한다고 하니 기가 죽어 축구도 포기하였다.
학교의 급우들 사이에서 가장 떨어진 부분이 단거리 달리기였다.
체력 측정을 할 때 5명이 달리면 항상 4~5등 하는 실력이었으니 달리기도 포기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나오신 아주 멋진 미술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2시간의 미술 시간 중 첫 1시간은 실기를 하고, 둘째 시간은 학생 각자의 작품을 교단으로 가지고 와서 급우들에게 보여주면서 서로의 작품을 평가하도록 하였다.
나는 이러한 미술 시간이 정말 싫었다.
아무리 내가 솜씨를 부려서 작품을 만들어도 친구들 작품과 비교하면 나의 작품이 너무 형편없었다.
나는 나의 솜씨 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미술 시간이 너무 싫었다.
내가 가장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나의 글씨체이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글씨체가 제대로 잡혀야 할 시기인 고학년이 되어도 잡히지 않고 악필보다 못한 졸필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깨끗하고 멋진 글씨를 보면 ‘나는 왜 저런 글씨를 배우지 못했을까?’ 하는 열등감에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글씨를 보여주기를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제껏 살아가고 있다. (컴퓨터는 나에게 엄청나게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
학창 시절에 멋진 붓글씨를 써서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여놓은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이래저래 참 솜씨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중학교까지 보냈다.
나의 중학 시절에는 텔레비전 방송사는 국영방송사인 KBS와 갓 출범한 민영방송 MBC 2개뿐이었다.
당시 MBC에서 일요일 저녁 시간에 “'This Is Tom Jones”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Tom Jones는 영국 가수로서 막 떠오르는 팝가수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조영남이 유행시켰던 ‘딜라일라’를 부른 가수였다.
곱슬머리의 장발과 턱까지 내려온 구레나룻, 쌍꺼풀의 눈과 진한 눈썹, 날카로운 콧날과 강한 모습의 입과 턱을 가진 야성미 넘친 가수였다.
국내외 젊은이들은 <Delilah〉, 〈It's Not Unusual〉, 〈Green Green Grass Of Home〉 등을 부르면서 맹수와 같이 포효(咆哮)하고, 때로는 가슴 저미는 애절함을 노래하는 Jones모습에 자기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해소해주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꼈으며, 이 멋진 가수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날에는 형들과 나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이 가수의 노래와 춤에 매료되었다.
나는 특히 Jones가 <Proud Mary>와 <Rock and Roll>을 부를 때 당시 유행하였던 나팔바지와 반짝이는 장식이 달린 셔츠를 입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온몸을 흔들어대는 그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나도 그렇게 멋진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못 이겨 아무도 없는 방에서 거울을 보면서 그의 춤추는 모습을 흉내를 내었다.
고맙게도 같은 방에서 기숙하였던 사촌 형이 직장에 취직하여 첫 월급으로 전축을 구매하였다.
나는 Tom Jones의 앨범을 어렵게 구하여,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이를 틀어놓고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였다.
연습하면서 Tom Jones의 발동작, 상체 흔들기, 표정 등을 생각하면서 똑같이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형들이나 부모님이 보시면 ‘미친놈 공부나 하지 무슨 짓이냐’고 할 것은 뻔해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나 혼자 열심히 연습하였다.
혼자 연습하니 비교 대상이 없이 중도에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2년 동안 꾸준히 춤 연습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즐거운 수학여행이었다.
친구들이 기타와 야외전축, 하모니카 등을 가지고 와서 기차가 출발할 때부터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고 야외전축을 틀어대면서 춤을 추고 야단 났다.
“~~~ 그건 너, 바로 너, 너 때문이야!” 한 무리의 친구들이 이장희의 <그건 너>를 외치면서 기타를 치고, 한쪽에서는 “Proud Mary keep on burning. Rolling rolling rolling on the river. Rolling rolling rolling on the river “ 정확한 발음과 음정은 아니지만 <Proud Mary>를 두 친구가 나름대로 열심히 기타를 치면서 부르고 옆에서는 한 무리의 친구들이 깡충깡충 춤을 춰댔다.
나도 흥에 겨워 그동안 연습하였던 춤 솜씨를 발휘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어 그들과 동참하였다.
열렬히 흔들어대는 내 춤 솜씨가 그들보다 전혀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가 긴 체형인 나는 그들보다 더욱 멋있게 다리를 흔들어 댈 수가 있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배삼룡의 개다리 춤(양다리를 마름모로 벌렸다가 오므리는 행동을 빠르게 반복하면서 추는 춤)을 중간중간에 썩어가며 추니, 친구들은 박장대소하면서 나의 흔들어대는 몸짓에 맞춰 기타를 치며 같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나는 그때서야 남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일명 날라리 춤이라 부르는 막춤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개성을 지닌 젊은이들의 집합체인 군대의 오락시간에는 갖은 장기가 등장한다.
가수 따귀 때릴 정도로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약장수/뱀장수 흉내쟁이, 창을 하는 사람, 고전 춤을 추는 사람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장기를 뽐낸다.
누가 박자 빠른 흥겨운 노래를 부를 때, 나는 그 노래에 맞춰 개다리 춤이 곁들여진 막춤을 추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보다 나의 춤에 사람들이 더 환호하였다.
이 덕에 선임의 귀여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직장에서 말단인 20대 후반이었다.
사무실이 명동 입구에 있던 KAL 빌딩에 있었다.
일과를 마치고 같은 부서의 직원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 삼아 마신 소주의 영향으로 직원 중 하나가 바람 잡아, 우리 일행은 명동성당 입구에 있는 로열호텔 지하 1층 디스코텍(discotheque)에 갔다.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이 눈을 찌르고, 혼탁한 담배 연기, 갖은 알코올 냄새, 많은 사람의 땀 냄새가 범벅이 되어 후각을 자극하며, 빠른 박자와 날카로운 목소리를 품은 음악이 청각을 후려친다.
플로어(floor)에는 빠른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흥에 겨워 팔다리 엉덩이를 흔들면서 춤을 추고 있다.
나도 흥에 겨워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플로어로 뛰어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몸무게가 67kg의 날씬한 몸매를 가졌으며 발과 몸놀림이 매우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한창때였다.
춤을 추는 플로어는 술좌석과 음악을 틀어주는 뮤직박스보다 약간 높았다. 따라서 플로어에서는 음악을 틀어주는 DJ를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그날의 DJ는 입담 좋은 개그맨 서세원이었다.
서세원의 야한 멘트와 함께 신나는 음악이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 (다음에 나오는 야한 멘트를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서세원이 하던 말 그대로이니까...) “흔들어 주세요, 흔들어 주세요. 방울 소리 딸랑딸랑 나도록. 비벼주세요, 비벼주세요. 가죽 타는 냄새가 진동하도록”라는 멘트와 함께 당시 유행하던, <one way ticket>, <Sugar Sugar>, <YMCA>, <Funkytown> 등 디스코 메들리도 이어지다가 갑자기 음악을 딱 멈춘다.
한참 신이 나서 흔들어 대던 사람들은 황당해하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뮤직박스로 달려가서 서세원에게 인상을 쓰면서 장난치지 말라고 주먹을 흔들면서 위협하니까, 서세원은 웃으면서 조금만 참으라는 식으로 손의 엄지와 중지로 검지 윗부분을 조금 보이면서 재롱을 피운다.
그가 웃으면서 보이는 약간 앞으로 돋아난 이가 생쥐의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웃음이 나온다. (서세원은 나와 동갑이므로 평소에 호감을 느끼는 개그맨이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음악이 나온다.
엉거주춤하였던 사람들은 다시 격렬하게 춤추기 시작한다.
한참 춤을 추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춤을 멈추고 있어 이상해 그 사람들을 쳐다보니 손바닥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나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쑥스러워 춤을 멈추려 하니 동료들이랑 주변 사람들이 계속 추라고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에이 모르겠다 싶어 있는 실력 다 발휘하여 춤을 추었다.
양쪽 발을 번갈아 앞으로 뒤로, 때로는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가며 원스텝, 투스탭, 앞으로 원스텝 투스탭, 앞뒤로 원스탭 투스탭, 양팔은 발의 움직임에 맞춰 앞으로 뻗다가 위로 올리며, 때로는 만세를 부르다, 주먹으로 앞을 치는 자세를 취하며, 머리는 발과 팔이 움직이니 그에 맞춰 앞뒤로 때로는 양옆으로 흔들어진다.
말 그대로 음악의 리듬에 맞춰 막 추는 것이 막춤이자 날라리 춤이다.
한참을 추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며, 근무 중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를 죽이시고, 가죽 냄새 그만 풍기시고, 조용히 엉겨 붙어 서로를 느끼는 시간을 가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목소리를 착 깐 서세원의 걸쭉한 멘트와 함께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흐른다.
블루스 타임(blues time)이다.
나는 자리에 돌아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무도 몰래 노력하여 단련한 막춤이 나의 장기가 된 것이다.
성당이나 다른 모임에서 여흥을 돋워야 할 자리에서 나의 막춤은 많은 도움을 준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몸이 많이 불어 예전의 스텝은 나오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흥겨운 자리에 조그마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고맙게 여긴다.
내가 어렸을 때 현재와 같이 힙합 등과 같은 춤바람 문화가 있었으면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하여 보면서 웃음을 짓는다.
내가 춤을 연습할 때 식구들에게 노출되었으면 누구와 비교되어 중간에 포기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혼자서 열심히 노력하여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을 때 그것을 남들에게 드러내니까 그들로부터 호응을 받아서 자신감이 생겨서 하나의 장기를 획득하였다.
반면 내가 중도에 포기한 것들도 남들하고 비교하여 빨리 습득하지 못한다고 하여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노력하였으면, 처음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보다 나중에는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주변 사람이 뭐라 해도 나만의 뚝심을 가지고 묵묵히 노력하지 못하였던 나의 심약함이 많이 아쉽다.
주변의 인생 후배, 특히 두 딸과 사위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현재 잘하지를 못하거나 잘되지 않아 낙심하면 나는 그들에게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인내와 노력은 재주와 행운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말을 하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