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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주 Nov 29. 2021

내 발등에 기차가……

초등학교 1~2년이던 시절이다.

내 고향 전주 전동에는 즐겁게 놀 수 있는 장소들이 많았다.

집에서 신작로 하나를 건너면 ,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순교지로서 서울의 명동성당 설계도를 가지고서 지었다는 전동성당, 그로부터 50m 떨어진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단아한 모습에서 옛 전주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풍남문(당시에는 개방되어서 아주 좋은 놀이터였다), 전동성당의 길 건너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 이와 맞붙어 있었던 나의 모교 중앙초등학교, 서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끝내고 귀경 중에 자신의 고조부인 목조가 살았던 전주에 들러 승전을 자축하면서 전주를 굽어보았다던 오목대(梧木臺), 오목대 바로 뒤 현재는 한옥마을 뒤편으로 길게 나있는 신작로에 길게 늘어서 있었던 철도, 알몸으로 뛰놀았던 전주천 다리 밑, 이곳에서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앞에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쳐 그 흩어지는 모습이 차고 시리다 하여 붙여진 한벽루(寒碧樓), 조선 태종 3년에 원님의 딸 연화 낭자가 사랑하는 남편인 정판서의 손자 정용이 죽어서 전주천을 따라 떠내려 오자 물속에 몸을 던졌다 하여 지어진 각시바위, 전주천을 바라보며 우뚝하니 서있는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치명자산 등 많은 장소가 다 나의 무료 놀이터였다.

이러한 놀이터 중 가장 나를 흥분시키고 지금까지도 나의 기억에 남는 것은 철도였다.

이 철도를 중심으로 안쪽 즉 동쪽에는 전주의 옛 고을이 형성되어있었고, 바깥쪽인 서쪽에는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고 있었다.

철도에서 즐기던 놀이는 전쟁놀이였다.  

10여 명이 하는 전쟁놀이는 두 편으로 나누어하였는데, 자연적으로 철도 서쪽에 사는 애들(당시에는 ‘뚝방 애들’이라 불렀다)과 철도 동쪽에 사는 애들로 나뉘어서 하였다.

전 전쟁놀이에서 이겼던 편이 조선군이었으니, 졌던 편은 자연스레 일본군이었다.

우리의 칼싸움의 승패는 두 가지 요인으로 갈렸는데, 그 요인은 ‘상대의 무기를 제압할 수 있는 우월한 무기 즉 나무칼’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담력과 체력’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운영하셨던 사업장인 연탄공장에서 일하던 아저씨들의 도움을 받아 좋은 목재를 사용하여 만든 튼튼한 나무칼을 나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뭇가지 칼로 무장한 적들보다 월등한 무기를 갖출 수 있었다.

나는 1월 생으로 당시 같은 학년의 애들보다 5~6개월 더 빨랐으므로 다른 애들보다 체격이 우세하였다.

싸움의 시작은 오목대에서 시작, 서로 추격전을 시작하면 철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그리 길지 않은 철도 굴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대부분 승리가 결정되었다.

우리 편의 우세한 무기와 나의 우세한 체력으로 인하여 열 번을 싸우면 8~9번은 다음에 우리가 조선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나면 상대방의 무기인 막대기 칼을 다 회수하여 오목대로 되돌아가 포로들에게서 정식으로 항복을 받고 다음 싸움을 기약하며 적의 무기를 되돌려주는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으로 전쟁놀이는 끝이 났다.

앗, 나에게 큰 악재가 생겼다!

하루는 우리의 줄기찬 공격에 도망을 가던 적들이 남쪽으로 가지 않고 북쪽 삼례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철길은 평행선으로 달리는 두 개의 레일과 이 밑에는 침목이 일정 간격으로 깔려있으며 침목 사이에는 자갈들이 깔려있어 이를 밟고 걸으면 울퉁불퉁하여 불편하고 이동속도가 떨어지는 반면 , 일정한 길이로 놓여 있는 침목의 간격은 우리의 보폭에 딱 맞아 이를 밟고서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북쪽으로 도망친 적군을 추격하기 위하여 침목 위를 한참 달리다 보니, 앗 아래가 이상하여 쳐다보니 침목 사이에 자갈이 사라지고 공간이 훤히 비어있다.

아뿔싸! 이곳은 철도의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을 연결시키기 위한 길을 신설하면서 20여 미터의 철길을 철교로 만든 지역이다.

나는 침목 사이가 빈 것을 발견한 순간 나의 다리는 덜덜 떨려서 앞으로 못 나간다.

도망자들은 이 철교를 지나서 저편에서 우리 편을 바라다보고 있다.

나의 편들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전혀 문제없이 이 철교를 건너서 적군과 교전을 벌이지만 대장이 그 철교를 건너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사이에 적군에게 제압당한다.

철교에 깔려있는 침목도 지상의 침목과 똑같은 거리로 놓여있었기에 다른 아이들은 거침없이 걸어갈 수 있는데 나는 침목 사이가 뚫려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나의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겁쟁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아~, 겁쟁이 용주야!”나는 자학을 하며 철교 앞에서 벌벌 떨면서 서있었다.   

나는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부터는 적은 필사적으로 공포의 철교로 향하기를 시도하고, 우리가 이 시도를 막지 못하면 우리 편은 패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편 부하들부터 “용주 너 같은 겁쟁이를 우리의 대장으로 할 수 없다.”는 준엄한 항의를 받고서 전쟁놀이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다음에 재미를 붙인 것은 ‘쇠붙이 갈기’였다.

기차가 지나가기 전에 못이나 동전 같은 쇠붙이를 철로에 놓고서 기차가 지나간 후에 그 자리에 가면 놓았던 못이나 동전에 기차의 무게로 인하여 납작하게 압착되어있다.

우리는 이러한 쇠붙이의 형태의 변화가 신기하고 즐거웠다.

이렇게 변화된 쇠붙이는 나름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납작하게 변형된 못을 둥근 막대기 끝에 박아놓으면 효율적인 썰매나 스키의 스틱이 되었다.

당시 10 환짜리 동전을 기차에 압착시키면 황동색의 넓고 예쁜 금속이 되는데, 중학교 형들이 이것을 시멘트 벽에 갈아서 하트 모양으로 만든 후 겉면을 치약으로 반짝반짝 빛나도록 연마하여 쓰고 다니던 교모의 양 옆에 달고 다니는 장식물로도 사용하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에 나는 “못 갈러가자”하고 친구들을 선동하여 철도로 갔다.

각자 자기가 가져온 쇠붙이에 침을 발라 철로에 놓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오는지 진단한다.

오늘은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소리가 예전처럼 우렁차지 않고 소리가 많이 약하다.

멀리 있어 그런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높은 언덕에서 기차가 오는지 망보고 있던 철수가 “기차가 온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  

멀리 남쪽에서 무엇인가 오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던 긴 기차가 아니고 매우 짧은 차량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나는 “야 피하자!” 하면서 밑으로 피하니 친구들도 철길 밑으로 피신하였다.

단칸으로 되어있는 이 차량은 순식간에 우리를 지나 저 북쪽으로 사라진다.

“야 저건 뭐여, 엄청 빠르다.”

그 물체의 빠름에 감탄을 연거푸 하니, 뚝방에 사는 기복이는, “저건 기차가 고장 났을 때 달려가서 기차를 고치는 꼬맹이 기차 인디, 저것은 엄청 빨라서 기차 바퀴가 철로를 떠서 가. 그려서 저거 지나갈 때 발을 철로에 놓아둬도 발이 안 다쳐.”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복에게, “야 시부럴 놈아, 공갈 치지 마.  바퀴가 지나가는데 어떻게 발이 안 다치냐? 공갈도 정도껏 쳐라.”하니 기복이는, “야 이 새끼야, 우리 성아가 직접 해봤다. 우리 성 아직도 발이 멀쩡허자너.” 씩씩거리며 말하는 기복이는 철교에서 나의 비굴스러움을 보기 전에는 나에게 기가 죽어지내던 놈이었다.

의기 당당하게 대드는 기복이의 기세에 더 이상 이견을 달지 못하고, 쇠붙이를 놓아두었던 곳으로 가니 몇 개는 놓았던 자리에서 튕겨져 나가고 대부분의 쇠붙이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쇠붙이들은 전혀 압착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에 기복이는, “용주, 너 이것 봤어. 바퀴가 떠서 지나 갔응게 전혀 납작해지지 않았자너. 내가 공갈쳤냐, 이 새끼야.” 하면서 기세가 등등하다.

기복이의 기세에 눌러, “정말이네. 야 그럼 니 성처럼 그 기차 돌아올 때 나도 철로 위에 발을 올려놓고 기다려볼란다.”하고 선언하였다.

철교에서의 굴욕을 만회시키고자 하는 오기와 호기심이 혼합되어 큰 결심을 하고 그 정비차량이 돌아오기를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기복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집으로 가고 단짝인 철수와 둘만 남았다.

무한정 기다릴 수 없어 이 기막힌 모험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철수와 헤어져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오니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8남매, 부모님과 할머니, 그리고 가정부까지 합하면 12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자리이니 상 2개를 차려 남자들의 식사가 끝나면 할머니와 어머니 등 여자들이 나중에 식사하는 체재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식구들에게 자랑스레 오늘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철로에 발을 올려놓으려던 모험’은 다음에 꼭 한번 할 것을 선포하였다.

나의 말을 들었던 가족들은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입을 떡 벌리시고 할 말을 잃고 계신다.

갑자기 내 왼쪽 볼에서 번갯불이 번쩍이고 엄청 큰 통증이 왔다. 

형들 중 가장 폭력성이 심한 셋째 형이 나의 옆에서 주먹을 쥐고 씩씩 거리면서, “이 미친 새끼, 어디서 얼빠진 소리를 하고 있어. 다시 한번 철도 길에 가면 죽여 버린다.”한다.

다른 식구들은 이러한 형의 폭력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하물며 형들의 폭력에 항상 나를 보호해 주시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잘 맞았다는 표정이다.

나는, “아 X발, 왜 때려, 내가 뭘 잘못했다고.”하고 악을 쓰니 이번에는 형의 오른발이  내 배를 강타한다.


어느 날, 이 추억을 아내와 두 딸에게 이야기하 두 딸은 그 당시에 부모님과 가족들이 지었던 표정을 지으면서 내 발과 얼굴을 번갈아 본다.

“그때 큰아빠가 아빠에게 좋은 일 하셨네.”라는 말을 작은 딸 유나가 하니, “정말! 큰아빠가 몇 대 더 때려주시지 그랬.”하고 미나가 맞장구를 친다.

아내도, “맞아. 더 맞았어야 했는데.”하고 덩달아 맞장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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