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윙키즈>
이것은 스윙키즈를 향한 예찬입니다
영화, <스윙키즈>
(들어가기 전에, 190302)
제목에도 쓰여있듯이 이 글은 영화 <스윙키즈>를 향한 예찬이다. <스윙키즈>는 작년 12월 말에서 올해 1월까지 내 겨울과 뜨겁게 함께 했던 영화이다.
사랑해마지 않는 도경수로부터 시작된 관람은 스윙키즈 전체를 향한 애정으로 번졌다. 근로를 끝낸 지친 몸은 반자동적으로 스윙키즈를 갈망했고, 영화관을 찾았고,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스윙키즈>에 왜 그렇게 가슴이 뛰었는지 확실히 설명하기 어렵다. 쿵쿵 울리는 탭슈즈 때문이었는지도. 나쁜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서글한 눈망울들 때문이었는지도. 영화의 배경이 지금과 같은 겨울이어서 <스윙키즈>에도 봄이 찾아오길 바랬었는지도.
영화 자체는 극찬을 받지도 흥행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잘 아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스윙키즈>의 아쉬움을 감싸 안는다. 이런 영화, 다들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
그래, 나에겐 참 좋은 영화였다. 그리고 나처럼 <스윙키즈>를 참 좋은 영화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브런치에 <스윙키즈>를 향한 예찬을 기록한다. 그러니 감히 독자를 제한해본다. 사랑한다면 읽어주시길.
2019.01.01 기록,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 읽기에는 그다지 친절하지도 정보적이지도 않은 단상들입니다
극단의 이분법만이 존재하는 공간. 닭과 개마저 자신을 빨갱이가 아니라고, 혹은 반동분자가 아님을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 한 사람에게 붙여지는 호칭과 평가는 얼마나 덧없고 가벼운 것일까? 자유를 갈망하는 포로들이 어느새 테러리스트 집단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스윙키즈는 한마디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이야기다.
빨갱이-반동분자-양공주-깜둥이로 부르던(불리던) 주인공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 (소장마저도 계속 삼돌이/삼룡이 등으로 부르다가 끝에는 삼식이로 부른다.) 이름을 가지는 것은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름을 가진 개인들의 인생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윙키즈는 단순히 이념의 갈등만이 아닌 그 속에서 살아 숨쉬었던 개인들에 주목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소통의 방식에서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호흡, 눈빛, 끄덕임 결국엔 춤”이라는 구도는 캐릭터들의 관계가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상관없이 그려진다.
특히 샤오팡과 병삼의 관계가 그렇다. 빗 속에서 기수를 사이에 두고 샤오팡과 병삼이 춤으로 대화하는 장면은 언어보단 춤, 몸 그 자체로 소통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공연 장면에서 기수와 멤버들이 한 번씩 눈을 맞추는 것 또한 그 어떤 말보다 깊은 관계를 보여준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그 상황이 스윙키즈의 비일상 공간인 강당에서는 무의미하다. 칼을 든 기수는 다시 탭슈즈를 집는다. 마지막 순간에 판례는 샤오팡을 감싸고 병삼은 이들을 감싼다. 잭슨이 오로지 다섯 명이 남긴 흔적을 더듬으면 그때의 기수가 말을 건다. 그러면 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며 다시 춤을 춘다. 인종, 성별, 이념 모든 것보다 몸의 가장 아래, 발바닥으로 가장 낮은 곳, 마루를 두드리며 그들은 가장 높은 곳을 상상한다. 샤오팡의 지팡이, 기수와 잭슨의 카네기홀. ‘후리덤’은 정말로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대중문화의 재현에서 해당 시대의 여성 재현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의도와 의미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재현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의도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러한 재현의 방식을 ‘선택’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판례와 매화의 캐릭터의 의도를 강형철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명확히 밝힌다. 그리고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분명 그런 지점들을 느꼈을 것이다. ‘전쟁통의 여자’로 이야기되는 캐릭터들은 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4개 국어를 하고도, 어쩌면 4개 국어까지 해야만 살아남아 온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던 판례. 이제껏 대중문화가 그린 ‘양공주’ 이미지 재현은 얼마나 부족한 것이었음을 판례를 통해 볼 수 있다. 병삼과 매화의 서사에서 병삼은 매화가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며 간절히 빈다. 그리고 병삼은 정말로 매화가 어떤 상황에 있던 살아있음에 눈물을 흘린다. ‘전쟁’ 영화에서 여성 이미지는 너무 쉽게 소비되거나 아예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스윙키즈는 ‘이때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를 생각하게 해 준다.
기동이 캐릭터의 의미가 깊다. 누구보다 기수를 따르며 탭 댄스를 좋아하다가도 광국의 말 그래도 광기 어린 선동에 제일 먼저 현혹된다. 남한의 아이 또한 ‘빨갱이’라고 지목된 사람에게 누구보다 제일 먼저 돌을 던진다. 어른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하는 아이들(결국 이 세계의 미래)은 비단 저 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윙키즈>는 작은 희망을 꺼트리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시퀀스 ‘스윙키즈’의 철조망이 사라지듯이 탭댄스를 보며 눈을 반짝이던 기동을 보라.
가장 최고의 씬은 음악과 함께한 씬들. 특히 기수의 하바나길라는 매번 소름 돋게 좋았다. 기수가 탭댄스에 빠지는 과정에서 현실의 음성들이 노래로 덮이는 부분들이 나오는데 나까지 심장이 쿵쿵거렸다.
판례와 기수의 modern love도 극장 스크린에서 보는 짜릿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서로 마주 보는 반대 방향으로 춤을 추다가 머리를 풀고 문을 박차며 종국엔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간다. 그러다 노래가 갑자기 끝나면 다시 신발을 놓고 넘어지며 현실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춤은 잭슨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남아있다.
그들의 삶이 끝나도,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 않고.
엔딩 크레딧 비틀즈의 Free as a bird는 가장 높은 저작권료를 지불했다고 한다. 크레딧이 올라가며 마주하는 삶들은 얼마나 작고 소중한지. 어떤 사람이 그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그 자체로 서로에게 축복이 아닐까.
<써니>에서 본 것 같은 몇몇 장면들이 강형철의 재미를 보여준다. 스윙키즈들과 미군들의 댄스 배틀이나 린다 캐릭터 같은. 그리고 깨알 디테일들이 많다. 포로 중 한 명이 ‘꼭 먹고 싶은 거나 옛날 얘기하면 죽더라’고 말하자마자 광국이 옛날 얘기를 시작하고 곧바로 죽는 씬/ 트위터에서 봤는데 잭슨을 꺼내기 위해 탈춤을 추기 전 사회자가 자리를 비울 때 드럼 아저씨가 스틱으로 등 긁는다는데 오늘 실제로 봐서 너무 웃겼다.. 다음에 볼 때 그 장면 유심히 보시길…
위기가 너무 많고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 러닝타임 또한 길긴 하지만 볼수록 보이는 점이 많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좋다. 기진-기수의 서사가 덧붙여지긴 하지만 기진과 대화하는 유일한 씬에서 경수 목소리가 너무 먹먹해서…흑흑…아니그리고영화관들댄스어롱안만들고뭐하세요
� 스윙키즈 (Swing Kids, 2018)
� 드라마/ 한국/ 133분
� 강형철
� 도경수(로기수), 자레드 그라임스(잭슨), 박혜수(양판례), 오정세(강병삼), 김민호(샤오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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