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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Mar 05. 2019

어찌하여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엔

영화, <가버나움>


어찌하여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엔
어디서 피어난 사랑과 연대가 있는가.
가득 채워 넘치는 곳엔 찾아볼 수 없는 그것들이.
영화, <가버나움>



나는 영화를 통해 고발성 다큐멘터리, 특히 다국적 난민과 같은 문제를 감상하기 주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음 의문에 답하지 못해서이다. "사람이 사람을 어떤 권력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연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연민에 추악함이 깃들지 않은 채로 영화를 대할 수 있을까?" 영화 자체가 가져야 하는 태도의 측면에서도, 영화를 보는 태도의 측면에서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의문이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 뭉클하게 감동받지도 못했다. <가버나움>을 보고 느낀 건 약간의 놀라움과 약간의 아쉬움, 그리고 약간의 텁텁함이었다. 재현과 반영의 놀라움, 드라마 장르로서의 아쉬움, 감정의 텁텁함. 


연민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텁텁하다고 남긴다. 우주의 길고 긴 시간에서 찰나를 살아가는 와중에도 그 찰나를 같이 사는 '동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몰랐던 것이. 

입안의 먼지처럼 텁텁한 감정은 사실임에도 허구라 믿고 싶은 레바논의 거리로부터 시작된다. 국가와 제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잡동사니가 된 그들이 쌓이고 쌓인 *'가버나움'. 그곳을 뚫고 나온 건 12살 레바논 소년 자인. '부모를 고소하겠다'는 자인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현실, 고통, 그럼에도 사랑.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묻어 나오는 사랑에 당황스러워 나오는 탄식. 자인의 미소를 반기면서도 텁텁함을 지니고자 한다. 아직도 '가버나움'은 어디에나 있으니 말이다.




* Capharnaüm : 잡동사니를 두는 곳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문제의 원인을 지적하는 데에 아쉬움 점이 있었다. <가버나움>은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는 법정 씬과 근거가 되는 자인의 삶의 행적들을 번갈아 제시한다. 영화를 따라가는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아마 '자인이 행복해지기를' 일 테고 영화는 무리 없이 그것을 해결해준다. 서류-즉, '이름'을 가지게 되는 자인의 얼굴로 마무리하는 영화는 감동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나는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법정에서 자인의 엄마의 항변을 잊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다'는 엄마의 울부짖음. 자인의 서사만큼이나 무겁게 다가온 항변이었다. 부모를 고소할 수밖에 없는 자인의 시선을 따라가면 부모는 '무작정 아이를 낳는 대책 없는' 가해자이다. 하지만 엄마의 항변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부모 개인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아이를 노동력의 수단으로만 취급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제도적, 국가적 차원으로 사유해야 할 문제를 영화는 '부모를 고발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요나스를 끝까지 책임지려 한 자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등을 보여주며 개인의 문제로만 수렴시킨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가버나움>에 대해 꼭 이야기하고 싶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여성과 연대의 측면이고, 두 번째는 영화에 세계가 반영되듯 세계에도 영화가 반영됨의 의미이다. 



<가버나움>은 앞서 말했듯 12살 소년 자인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본다. 인상 깊었던 것은 마주하는 세계에 자인이 투쟁하고자 하는 문제들이 여성 문제라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매매혼으로 팔려간 사히르, 불법체류자로서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고 딸을 뺏긴 라힐, 그리고 자인처럼 이름 없이 유령처럼 삶을 살아가게 될 요나스.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가 직시하는 난민, 특히 여성과 아동 문제는 비단 레바논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연민의 시선을 고민하는 나에게  <가버나움>의 놀라움은 연대였다. 정확히는 자인과 라힐과 요나스의 연대. 국가와 제도의 허울에서 이름을 갖지 못하는 존재들의 연대. 어찌하여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엔 어디서 피어난 사랑과 연대가 있는가. 가득 채워 넘치는 곳엔 찾아볼 수 없는 그것들이.



두 번째는 영화에 세계가 반영되듯 세계에도 영화가 반영됨의 의미이다. <가버나움>이 끝나면 올라오는 자막은 자인을 비롯한 '비'배우들의 캐스팅, 가버나움 재단 설립과 영화 이후의 소식들이다. 가장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영화의 외적 파급력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어쨌든 응원하고 싶을 때가 있다.(사실 꽤 많다.) <가버나움>이 바꾸어낸 삶들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영화라는 예술에 말이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탠저린>과 <플로리다 프로젝트>.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한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또 무척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들이다. 영화가 세상의 창으로서 던지는 질문들과 직시하는 세계에 감당할 수 없더라도 온 몸으로 봐야 할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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