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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Mar 02. 2019

장르가 코미디라는데

영화, <송곳니>

장르가 코미디라는데
 영화, <송곳니>



2019.02.14 기록,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다지 친절하지도 정보적이지도 않은 단상들입니다


더 페이버릿 개봉 기념 요르고스의 <송곳니>관람. <킬링 디어>,<더 랍스터> 이후 세 번째로 만나는 요르고스는 여전히 나에게 감탄의 박수를 자아낸다. 영어 제목이 Dogtooth라니(의미심장을 넘어선 대놓고 드러내서 신기하다는 뜻). 카메라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이번 <송곳니>는 필름 느낌이 가득해서 어떻게 촬영했는지 궁금했다. 요르고스 특유의 퍼석퍼석한 질감을 한껏 느꼈던 것 같다. 요르고스 세계관(?)의 주인공들은 어쩜 다 하나같이 세계관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감독의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으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역시 찝찝한데 마음에 들어..어쩜..


평소 언어학과 기호학에 관심이 많아서 <송곳니>의 우화가 좋았다. 한 세계의 지배는 언어의 지배로부터, 공간의 지배로부터. 지배를 생성하며 유지하는 것이 언어라면 언어를 생성하고 정의하는 것-권력을 가지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의 전유이다. 하지만 큰 딸은 스스로를 브루스라 명명한다. 언어를 생성한 그 힘은 송곳니를 빼는, 세계를 벗어나는 힘으로 곧장 이어진다. 브루스의 언어는 주체로서의 의지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둬도, 누구를 데려와도 안으로부터 무너짐은 겉잡을 수 없다. 큰 딸이 스스로를 이름 짓듯이, 작은 딸이 ‘핥음’-거래-라는 소통의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하듯이. 

오프닝 장면이 떠오른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동차를 타는 것인데, 외부로의 출입 금지 수단은 고작 작고 낮은 쇠사슬이었다.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이 가장 무시무시하고 커 보이기 마련이다. 한 발자국도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담장만 넘으면 나오는 것은 아버지를 닮은 초라한 쇠사슬과 펼쳐지는 자유일 테니.



사실 흥미로웠던 지점은 송곳니를 부러뜨린 이후~엔딩이다. 어떤 해석이 정확한지 인터뷰를 찾아보진 않아서 모르지만 트렁크를 선택한 것과 결말 부분 두 지점에서 해석이 갈리더라. 

내 생각은 이렇다. <송곳니>의 세계는 아버지의 말이 절대 지배하는 공간이다.(가부장제의 세계) 주체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은 한 순간에 모든 부조리를 깨닫게 하진 않을 것이다. 브루스는 주체가 되어 집을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된다. 그랬을 때 그것을 표출하며 선택하는 방법-즉 아버지의 세계에 반발하는 행위-은 역설적이게 아버지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송곳니를 빼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후에 트렁크에 들어가는 것 역시 주체가 된 브루스의 계획적인 계략(?)이라기 보단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비롯되는 모순일 수 밖에 없다. 브루스가 배운 바에 따르면 담장을 넘는 방법은 오로지 자동차 밖에 없으니 말이다.
엔딩은 글쎄. 암전 뒤 바로 크레딧이 나왔을 때 눈이 부셨던 나처럼 트렁크가 열리고 눈이 부신 채로 두 발을 내딛는 브루스가 있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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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앞서 말한 송곳니 쇼트부터 마지막 시퀀스까지 완벽. 보면서 숨넘어갈때쯤 나오는 크레딧에 이번에도 요르고스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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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영화에 나오는 <송곳니>의 장르는 무려 코미디. 단 한번도 웃지 않았지만 코미디 인정.. 아 빨리 더 페이버릿 보고싶다!



� 송곳니 (Dogtooth, 2009)
� 드라마 / 그리스 / 93분
� 요르고스 란티모스
� 크리스토스 스테르기오글루(아버지), 미셸 발리(어머니), 아게리키 파루리아(큰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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