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마 잭의 집>
영화는 이미 끝났고, 나는 이것을 봐버렸고, 그리하여 문제적이게 되었다.
영화, <살인마 잭의 집>
문제적인 영화는 무엇일까.
정확히 정의 내릴 순 없겠다. 하지만 <살인마 잭의 집>을 상영되는 극장 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은 이럴 것이다. “문제적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살인마 잭의 집>은 상영 20분 만에 100명 이상의 퇴장자가 속출했다던, 라스 폰 트리에가 5년 만에 내보인 신작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 영화를 “0점 아니면 5점을 줄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기 전 상당히 겁을 많이 먹었는지라 영화의 시각적 잔인함에 대해 걱정했는데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화가, 라스 폰 트리에가 잭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참 모든 측면에서 문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적인(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사회에서 싸이코패스는 존재 자체로 문제가 된다. 라스 폰 트리에는 존재가 문제인 잭을 통해서 이야기한다. 살인과 예술, 그리하여 악과 인간을 말이다. 영화는 적어도 나에게는 어떤 이해도 인정도 구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정상적이기 위해 끝없이 감춰왔던 것들을 말이다.
그렇게 ‘보여짐 당함’으로써 우리는 헷갈리기 시작한다.
라스 폰 트리에가 심어둔 장치들을 통해서. 어찌 보면 그의 가장 솔직한 고백을 통해서. 잭의 자잘한 코미디들에 피식거린다. 피해자들의 아둔함을 보여주면서 잭이 느꼈을 살인 충동에 자신도 모르게 동조된다. 어느 순간 잭이 이야기하는 살인의 예술에 순간 끄덕이게 된다. 그가 저지른 살인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으로써 완성된 그의 예술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영화에게, 예술에게 경외의 공포를 느낀다. 사회 기반의 도덕과 규범들이 한 순간에 뒤집어지는 경험들이었으니.
그렇지만 20년 이상 도덕 규범 속에서 살아왔다면 으레 한 순간에 빠져들다 “아 그래도 저건 좀” 하고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정신 차리면 스크린엔 ‘어느정도 그럴만한’ 잭 대신 ‘경악스러운 사이코패스’의 궤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 느꼈을 낯설고 외면하고 싶은 동조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라스 폰 트리에가 유도한 잭과의 심리적 동조를 통해 잠깐이나마 보았던 그것이 악이라면, 나는 잠시나마 지옥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잭이 떨어지는 지옥은 네거티브로 인해 다시 한 번 하얀 빛으로 변한다.
그렇게 지옥은 하얀 색으로 (잭에겐 천국일수도), 하얗다고 믿어온 빛은 사실 어둠으로. 흘러나오는 경쾌한 “HIT THE ROAD, JACK”에 느끼는 것은 아찔함이다. 마땅히 도덕 해야 할 어떠한 가치도 없는 라스 폰 트리에의 세계에 다녀옴으로써 말이다.
<살인마 잭의 집>은 도덕이라는 밧줄을 절박히 잡고 있는 손가락을 하나씩 놓게 만드는 영화다.
영화가 내게 제시했던 질문은 이렇다. “’옳은가?’가 아니라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가?” 우리는 진정한 악을 규명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처단해야 마땅한 악을 처단할 수는 있는가? 그렇다면 처단은 무엇인가? 라스 폰 트리에는 관객들이 그 동안 곱게 쌓아온 도덕관념을 세워두고 쳐다보게 만든다. 물론 라스 폰 트리에의 생각 (잭의 궤변으로 대변되는)이 다 옳은 것도 다 감탄스럽게 완벽한 것도 아니다. 그 동안 쌓아온 도덕관념이 다 글렀다는 것도 세상은 악과 선이 하나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며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대답하든 아니든 나는 그것을 보았다.
영화는 이미 끝났고 라스 폰 트리에는 유유히 사라졌으며 남은 것은 나 그리고 내가 ‘봐 버린’ 것이 명확한 <살인마 잭의 집>의 티켓이다. 나는 영화가 던진 수많은 부도덕한 질문들과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애매한 가치들과 지옥을 다녀온 듯한 아찔함과 짜증나게(?) 예술적이라고 생각되는 몇몇 연출 장면들을 오로지 홀로 기억해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기 전과 본 후의 나는 (영화와는 무관하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을 어찌하면 좋을까, 참 문제적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