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6. (세월호를 기억하며)
2014년의 일이었다. 다니던 수학 보습 학원에서 대학생 채점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엿들었었다.
"어쩜 그럴까요. 애기들인데. 너무 안타까워요."
"그러게요. 이 고운 아이들한테 이런 일이 생겼다는게 믿기지가 않아요."
2017년의 일이었다. J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또작'이라는 신성고등학교 교지편집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때, J선생님이 우리에게 '금요일에 돌아오렴'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 � 지음)
책을 읽고, 토론하는 활동을 진행시키셨다. 프로젝트를 맡았던 아이들은 단원고 보존 현장까지 다녀와,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고 왔다.
흔히, 한국 사회 내에서 감성적인 것들에 대해서 소위 '감성팔이'라는 캐치프래이즈를 많이 내걸곤 한다. 이해할 수 있다. 감성보다 이성을 앞세우는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훨씬 편하고, 용이하다. 잊어버리면 된다. 앞만 보고 달리면 된다. 낙오자는 신경 안쓴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길을 걷다가 신발끈이 풀릴 때가 많았다. 몇 아이들은 신발끈을 묶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몇 아이들은 그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쭈구려 앉은 나와 점점 멀어졌다.
나는 기다리고 기억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망각하고 질주하는 사람일까? 전자를 지향하지만, 솔직히 부끄럽게도 후자에 가깝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면서 그런 나의 죄책감을 더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이다.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알아주겠지. 내가 한 줌의 흙이 되어도 누군가는 내 뜻을 알아주겠지.
5.18과 4.3은 '한강'으로 기억되었다.
신천대학살은 '황석영'으로 기억되었다.
한국전쟁은 '김동춘'으로 기억되었다.
세월호는 '4.16 작가기록단'으로 기억되었다.
기억되었다. 기억되었다. 기억되었다. 기억되었다. 기억되었다. 기억되었다.
2017년 여름방학에 유튜브를 보다가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읽은 부모의 장례식을 녹화한 영상을 보았다. 그건 슬픔이라는 단어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앞으로 한국사회든 세계사회든 끝없이 이해할 수 없고, 비극적인 일들은 일어날 것이다. 예방이 제일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예방할 수는 없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록하는 것. 기억하는 것.
나는 오늘도 이렇게 쓰고, 기록하고, 기억한다. 천개의 바람을 위해.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 한강 저, p.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