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PD Jun 17. 2023

<블랙>

2009-09-20

어릴 적에 부모님께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남들보다 체구도 적었고 운동 신경이 부족했습니다. 수학 실력이 뒤처졌고 미술에도 소질이 없어 보였습니다. 부모님께 '날 왜 이렇게 평범하게 낳았느냐'라고 철없는 원망을 소리 높여하기도 했었고, 급기야 진학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왜 나를 세상에 내보내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라고 원망을 했습니다.


뿌린 데로 거둔다더니 제가 아이에게 그 소리를 듣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영어, 국어 등이 힘에 부치는지 과제를 할 때마다 엄마랑 크게 한 판씩 싸움이 나곤 합니다. 급기야는 아홉 살짜리 입에서 상상 못 할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왜 나를 낳았냐고, 왜 나를 이렇게 낳았느냐고"


그러자 엄마도 열을 받았는지 받아칩니다.


" 이 자식 말하는 거 봐. 너 나가. 나가서 들어오지 마."


대답이 가관입니다.


"싫어. 나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냐."


그 소리를 듣다 한참 웃었고 예전 제가 부모님께 했던 비슷한 원망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제게 어떤 신문 스크랩을 보여 주셨는데 지금 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름대로 위안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왜 낳았냐고 묻는 아이에게 뭐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까요? 저는 '세상에는 아주 좋고 행복한 일이 많기에 그걸 경험해 보려고 태어난 것이다'라고 일단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너 안에 너도 모르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알아보려고 태어났다'라고도 대답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아이의 태어남으로 부모에게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보게 해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어제 촬영 중간에 시간이 비어 영화 [블랙]을 보았습니다. 헬런 켈러처럼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게 된 아이가 한 선생님과 수화를 매개로 자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새삼 제가 가진 것에 감사할 수 있었고 보통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함의 특권을 다시 느낀 기회였습니다. 세상에 나와 평범한 육체를 가진 순간부터 축복이 시작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이가 그 축복을 마음껏 활용해 수많은 성취의 기쁨을 누렸으면 합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느끼는 세상에 사는 이유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페미니즘 동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