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PD Jun 21. 2023

<베토벤 바이러스>

2008-09-21

[돌아온 뚝배기]를 쓰고 계신 작가 김운경 선생은 한 강연에서 '등산'의 '등정(登頂) 주의'와 '등로(登路) 주의'를 비교한 바 있습니다. 등정은 어찌하든 산에 올라 정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등정주의 산악인은 결과가 중요하기에 이미 잘 개발된 쉬운 코스를 선택합니다. 등로주의는 다른 산악인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여 산에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 선생은 참된 등산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방식이 아니겠냐며 다른 작가들에게도 등로주의를 권하고 있습니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초가을에 우리들은 등로주의로 험산을 오르고 있는 드라마를 만나고 있습니다. 수요일, 목요일에 찾아오는 [베토벤 바이러스]는  선악의 분명한 대립, 출생의 비밀, 얽히고설킨 애정 관계 등 우리 드라마의 쉬운 등정코스를 버리고 험로를 개척하며 시청자들을 찾아 오르고 있습니다. 


[베토벤 바이러스] 참으로 만들기 어려운 드라마입니다. 드라마는 연기자가 직접 할 수 없는 일을 소재로 선택한 순간부터 비바람이 몰아칩니다. 우리 드라마에  멜로드라마가 많고 전문 드라마가 없는 이유입니다. 하물며 그런 연기자가 떼로 모인 몹씬이 많아지면 그나마 더 힘들어져 산악인의 무거운 배낭에 돌덩어리를 추가로 올려놓은 격이 됩니다. 연기자들은 그들이 실연할 수 없는 악기를 다뤄야 하고 그들이 오케스트라로 모여 합주를 해야 합니다. 스케줄이 꼬일 겁니다. 홍작가들과 이재규 감독은 고생을 자처했습니다. 저라면 죽었다 깨나도 하지 않을 선택입니다.


드라마는 1부에 죽었다 깨나도 공연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오케스트라를 모아 놓습니다. 그들이 8월 21일에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여부가 우리의 몸을 달게 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정복해야 할 산의 높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캐릭터입니다. 김명민이 분한 강 마에스트로나 각자 '핸디캡'을 지닌 캐릭터들이 어떻게 그들의 장애를 극복하고 등정에 성공할지 궁금합니다. 특히 그 캐릭터들이 드라마의 진행과 더불어 어떤 멋진 사람들로 변화할지 제 궁금증은 매주 수 목요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이재규 감독의 연출에는 감탄이 더 해집니다. 제작 시간이 많지 않은 TV 드라마는 어느 순간은 늘어질 수도 있고 쓸데없이 급한 경우도 생깁니다. 허점이 노출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 허술한 순간을 못 견디며 채널을 돌리고는 합니다. 제가 제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이재규 감독은 잘 조여진 바이올린 스트링처럼 탄력 있는 소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2부에서 강마에스트로의 지휘 실력을 단원들에게 보여주는 가브리엘의 오보에' 연주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영상을 부차적인 것으로 내리고 효과와 음악을 통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모습은 연출로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부러운 것은 이감독이 미디엄 숏(MS)을 적절히 배치시키는 점입니다. TV드라마는 '클로스 업'의 예술이라 부를 정도로 바스트 샷이나 클로스 업으로 배우의 얼굴을 많이 찍습니다. 인물의 허리 윗부분을 잡는 MS은 보통 드라마에서는 그룹샷을 잡는 경우 외에는 발견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 감독은 미디엄 숏을 잘 활용해 와이드 샷과 타이트 샷 중간에 리듬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미디엄 숏으로 인해 타이트 샷들은 더욱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풍성해 보입니다.


홍작가들의 찰기 있는 대사는 이 드라마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습니다. 강 마에스트로의 압축된 대사 한마디 한마디뿐 아니라 각 캐릭터들의 정서를 은근슬쩍 다른 상황에 빗대어 은유와 직유의 방식은 캐릭터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왜 '아욱'은 무시하냐는 송옥숙의 대사는 보는 이의 가슴에 뜨거움이 치받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4회에 강마에가 송옥숙이 분한 첼리스트의 술주정을 받아준 후 만난 악장 이지아에게 던진 대사 '이 안에 똥 있다. 첼리스트 똥 덩어리...... 치워라'는 그 유머와 재치에 제 배를 잡고 뒹굴게 하였습니다.


이제 4부가 지났습니다. 강마에가 지휘를 한다 안 한다는 자존심 싸움은 이제 버리고 드라마가 고산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 시점입니다. 작가와 연출이 얼마나 풍성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는지 현재의 인물 관계를 볼 때 좀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차라리 8부 정도로 진하게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팬의 한 사람으로서 가져봅니다. 아무쪼록 드라마가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 지금의 완성도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상을 오르지 못해도 좋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길을 열고 있습니다.


p.s: 이런 음악드라마가 사실 처음은 아닙니다. 일본의 '노다메 칸타빌레'도 있었고 SBS에서도 '크리스털'이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결과가 좋지 않아서 인지 너무 일찍 나온 탓인지 '크리스털'은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만...


작가의 이전글 [그들이 사는 세상]이 시청률이 낮았던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