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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PD Jun 30. 2023

<일지매> 이야기

2007-11-28

내년 상반기 방송을 목표로 [일지매]의 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언론에 알려진 대로 이준기 씨를 [일지매]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여 현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일지매에 대한 사전 정보와 제작배경을 알리고 싶어 오늘 글을 씁니다.


 기획 초기부터 많은 관계자들이 제게 ‘일지매’가 어떤 인물인가, 과연 실존인물인지, 원작이 있는지 그 인물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요청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한양대학교의 서신혜 선생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 내용이 아마 제가 드리는 정보의 대부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지매는 실존인물인가?


홍 길동과는 달리 실존 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명나라 시절에 나룡이라는 도둑이 재물을 훔치고 매화 한 가지를 남긴다는 유래가 있어 (이각) 박안경기 제39편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일지매가 등장합니다. 청나라 시절 화본소설(극본) 환희원가(歡喜寃家) 24편에도 그 이야기가 수록되어 전합니다. 그러기에 실존했다 하더라도 중국의 일이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실존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환희원가는 상당히 야하다고 합니다. 미성년자는 읽으시면 안 됩니다.)

  

 일지매는 허균의 [홍길동전]이 있는 것처럼 원작이 있는가?


앞서 언급한 이야기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수입되었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 파병을 한 후 명은 국력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청의 발흥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런 명청 교체기에 일지매의 이야기가 중국대륙에 등장하였고 곧 조선에 수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조 시절 간행된 <중국소설회모본>에 일지매에 관한 삽화가 에 등장하니 그 이전에 수입된 것으로 봐야겠죠.


오늘날 주로 얘기되는 일지매의 캐릭터는 조선 순조 때의 문인 추재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인생의 늘그막에 심심풀이로 조선 기층민중들 사이에서 나온 기이한 인물 이야기를 정리한 [추재기이](秋齊紀異)에 전하고 있습니다.


“일지매는 도둑 중의 협객이다. 매양 탐관오리들의 부정한 뇌물을 훔쳐 양생송사(養生送死)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처마와 처마 사이를 날고 벽에 붙어 날래기가 귀신이다. 도둑을 맞은 집은 어떤 도둑이 들었는지 모를 것이지만 스스로 자기의 표지를 매화 한 가지 붉게, 찍어 놓는다. 대개 혐의를 남에게 옮기지 않으려는 까닭이었다.” (강명곤 [조선의 뒷골목풍경]에서 재인용)


이 내용이 오늘날 일지매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일제시기에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매일신보>에 연재한 <일사유사>를 통해 일지매를 소개하였습니다. 그 후 1974년의 정비석, 이후 최정주 등의 작가를 통해 소설화되었고 영화도 나왔습니다. 물론 우리 대중에게 가장 인상을 많이 사로잡은 것은 75년부터 일간스포츠를 통해 연재한 고우영 선생의 만화 <일지매> 일 것입니다. 
정비석 선생이나 고우영 선생 두 분 모두 서문에 보면 국내의 원작을 찾다 실패했다고 적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위의 인용문 정도의 실마리로 그들만의 일지매 캐릭터를 창출해 내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일지매의 기원은 중국으로 봐야겠고 그것이 저잣거리를 떠도는 이야기로, 임란 이후 계속 청나라, 일본 등 외세에 시달린 조선민중을 위로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때문에 중국의 TV나 영화에서도 일지매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겠죠.


제가 [일지매]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9년도의 일입니다. 당시 SBS 제작본부장인 안국정 님에게 4페이지짜리 보고서로 [일지매]를 제작하자고 제안했습니다. SBS에서는 김석훈을 주인공으로 [홍길동]을, 정흥채를 발굴해 [임꺽정]을 제작한 바 있기에 민중 사극의 연장선상으로 [일지매]를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습니다. 당시에도 고우영 화백의 [일지매]를 염두에 두었으나 이미 판권이 김종학 프로덕션에 팔려 있었습니다. 99년 만해도 외주 프로덕션과 방송사 내부 PD가 손을 잡고 드라마를 제작하는 예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일지매] 같은 무협사극을 하기에는 제 경력이 일천하기에 곧 포기했습니다.


2007년 1월, 그 불씨를 되살린 것이 제작사인 '초록뱀'과 이제 사장이 된 안국정 님이었습니다. '초록뱀'은 현재 대조영의 작가 장영철의 버전으로 [일지매]의 제작 기획을 제안했고 사장은 [일지매]의 제작 검토를 지시했습니다. 마침 예전에 제안을 한 제가 있었기에 [일지매]의 제작 기획은 금방 불꽃이 일었습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고우영 선생의 원작을 확보하기 위해 저작권자와 접촉을 했으나 이미 다른 신생 외주제작사와 협상 중인 것을 알았습니다.  당시 그 신생사에 연락을 취해 제작을 발주했다면 저는 원작을 쉽게 확보할 수도 있었고, 그 신생사는 원작의 확보만으로 방송사와 연출을 쉽게 구하는 윈-윈의 협상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SBS 드라마국의 시선으로는 초반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될 수밖에 없는 사극의 제작을 신생사와 보조를 맞춘다는 것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주몽]등을 제작한 경쟁력을 지닌 외주사인 '초록뱀'을 적으로 두는 것이 무모한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조금이라도 외주사의 도움을 받으며 시작하는 것이 [일지매] 프로젝트를 원활히 진행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초록뱀을 제작 파트너인 외주사로 선정하고 원작 구매를 의뢰했습니다만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들었습니다. 그전에 [일지매]의 대본을 집필할 작가를 섭외한 저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고우영 원작과는 다른 버전으로 기획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초록뱀과 저는 내심 [일지매]의 길을 닦으면 원작을 구입한 제작사가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신생사는 방송 편성을 얻기가 쉽지 않아 공동 제작이라는 방법으로 제작 경험을 쌓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사업적인 관점으로 볼 때 아직도 윈윈의 협상을 할 여지가 있었지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은 저의 오만함 때문에 불행히도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양상이 전개되었습니다.


만일 그 당시에 황인뢰 감독께서 [일지매] 제작에 이미 발을 들이셨거나 아님 제작에 참여하실 의도가 있음을 알았다면 저는 아마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사 기획이 있을 때 물 타기를 하지 않는 것이 저희 업계의 불문율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90년대에 드라마 PD를 시작한 저에게 황인뢰 선배의 문화적 세례는 참으로 지대했습니다. 그런 대 선배와 유사기획 경쟁을 한다는 것은 저는 소모전이자 전파의 낭비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사의 의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일지매]란 드라마를 잘 집필할 수 있는 작가를 만나 고우영 원작과는 다른 새로운 버전의 [일지매]를 만들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 기획안에 이준기, 이문식, 김성령, 이원종, 박시후, 조민기, 김뢰하, 안길강 같은 좋은 배우들이 호응을 해주었습니다. 이제 SBS 일지매 기획은 제 손으로 죽이기에는 뱃속의 아이가 너무 많이 자란 것입니다.

그럼에도 황인뢰 선배와 그 제작사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감독께서 SBS [일지매]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거리와 시간차를 두고 제작하신다면 제가 미력하나마 돕고 배움의 과정으로 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대선배께 죄송스러운 마음을 전합니다.



당시  출발이 빨랐기에 제작도 먼저 들어가고 방송도 먼저 나갈 수 있었습니다. 윗글은 MBC의 <일지매>를 의식해, 우리가 고우영 선생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좀 유치해 보여 얼굴이 붉혀집니다. 긴 시간이 지나 황인뢰 선배를 만나 사죄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술 한잔 하기로 약속하고 연락 못 드린 지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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