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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PD Jun 07. 2023

노지마 신지/알랭 드 보통과의 대화

2013/05/05

한국 방송작가 협회와 SBS 문화재단의 초청으로 일본의 극작가 노지마 신지와 스위스의 작가이자 철학가 알랭 드 보통이 내한했습니다. '최강의 콘텐츠 창조자를 만나다'란 제목으로 강연과 질의응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번뜩이는 재치와 천재성을 지닌 대작가들의 비결을 훔쳐보고 싶은 한국의 작가와 프로듀서에게는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야기들은 여러 곳에서 기사화되었으니 저는 제가 재미있게 느낀 이야기만을 옮겨보겠습니다.


두 작가에게 공통으로 느낀 점은 그들은 글쓰기를 회사원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양의 글을 의무적으로, 또는 규칙적으로 쓴다는 방식은 비단 이 두 분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수현 선생과 노희경 작가가 이렇게 작업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스티븐 킹도 그의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글쓰기를 정례화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직업으로 글쓰기를 하려는 분은 대작가들의 이런 습관만은 따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노지마 신지는 강연 중에 '드라마의 대사는 일상어와는 달라야 한다.'라고 주장했어요. 노지마 신지는 사전을 자주 뒤지는데 비록 사어(死語) 일지라도 뜻이나 운율이 좋으면 기억해 놓았다가 나중에 드라마의 대사로 활용한답니다. 비속어나 욕설까지 대사에 담아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대사를 선호하는 작가나 PD에게 그의 말은 귀담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사는 일상어 이상의 언어인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너무 공중에 떠 있어 유치 찬란하거나 관념적인 대사를 쓰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격조가 떨어지는 것도 문제이겠지요. 그는 대사 중간의 호흡이나 추임새 등에도 아주 신경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대화체를 지향하기에 당시 사회에 널리 퍼지는 유행어는 절대로 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작가로서 가진 자존심과 의지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남성이기에 여성의 감정이나 행동을 알기 위해, 여성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고 밝혔습니다. 남녀 모두의 감정을 파악하기에 자신은 일종의 'Bisexual'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답니다. 저는 드라마가 남성성이 강하다는 평을 듣곤 하는데 이 점은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장에서 진행을 보던 배성재 아나운서가 '바이섹슈얼'을 동성애로 알아듣고 빗나간 질문을 한 것은 좀 아쉬웠습니다.


작가로서의 그는 시청자의 취향을 살핀다기보다는 '내 작품에 시청자를 유혹한다, 세뇌시킨다'는 태도였습니다. 시청자를 끌어들이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 하는 우리나라의 제작진에게 그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천재적인 작가는 조용하고 외로운 환경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렇지만 작가로서 자신의 글에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밤이 아니라 낮에 글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대본이 늦어본 적이 없다는 노지마 작가의 말에 모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속사포 같은 말투로 그의 철학과 주관, 생각을 청중에게 쏟아내었습니다. 노지마 신지와는 달리 작가는 '밤을 잘 이용해야 한다'라고 해서 강연을 연이어 들은 관객은 대작가를 서로 다른 입장을 비교하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에 인용해 "인생은 고통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문제이든 답이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의 자기 계발서를 싫어한다고 밝혔습니다. 정답이 없지만, 정답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겠지요. 남들도 나처럼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위안을 받을 것 같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강연 중에 제가 제일 인상 깊게 들었던 것은 '클리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클리세란 것은  '노력하지 않고 집어넣은 진부한 문구나 생각, 개념을 말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생각 없이 반복되고 있는 생각이나 문구, 영화적 트릭을 의미한답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분은 듀나게시판의 클리세에 대한 정의를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http://djuna.cine21.com/movies/cliches_0000.html 


그는 작가의 가장 큰 것은 클리세라고 주장하고, 클리세를 없애기 위해서는 실제로 현실에서 같은 상황을 주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고 얘기했습니다. 남녀가 헤어질 때 여자가 남자에게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반복되는 데, 실제로 그렇게 때리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TV드라마에서는 엄마가 아프시면 이마에 하얀 무명천을 두르고 자리에 누우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실제로 그렇게 머리에 띠를 두르시는 분은 별로 없으니, 알랭 드 보통의 지적이 맞다고 생각해요. 클리세를 피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뭔가 좀 이상하게 상황을 풀어야 좋다는 말이었어요. 좀 이상해 보이지만 특별한 상황을 쓰는 것, 그것이 개성 있고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어낸다는 작가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작가로서 연출로서 '돌직구'같은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시청률을 의식해서 흥행의 공식이나 성공의 경험을 복사해 놓은 작품들이 아무 감동 없이 버려지는 것은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라는 것이 진부함과 신선함을 잘 버무려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동안 우리는 너무 진부함에만 길들여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드라마가 끝났을 때 마지막까지 공중에 떠돌아다닐 한마디가 무엇일지, 다시 한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무명띠를 두르지 않고 말이에요.



시간이 흘러 이 글을 보니, 다시 옛날의 순순한 시절로 돌아가게 합니다. 작가와 연출은 직구를 던져야 합니다. 어설픈 커브를 흉내 낼 게 아니라.(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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