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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PD Jun 07. 2023

<전설의 주먹> 2013

2013/04/16

제 어린 시절, 학교에 싸움 대장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 때 별 볼 일 없던 친구 A는 중학교에 가더니 그 학교의 캡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먼 훗날 근황을 알아보니 일찍 가장이 되었고 포장마차를 하며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캡이었던 B군은 저와 가까운 사이였어요. 그 친구는 중학교 시절 새로 등장한 캡에게 밀리면서, 주먹계에서 사실상 은퇴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독서실 제 옆자리에서 공부하곤 했는데 근황이 궁금합니다.


[전설의 주먹]은 이렇게 3, 40대 남성의 향수를 자극하는 학교 캡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캡에 대한 추억은 아마 누구나 비슷할 거예요. 제가 어릴 적에는 '짱'이란 말을 안 썼어요. '캡'이었죠. 저는 절묘하게 캡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얌생이였죠. 강우석 감독과 장민석 작가는 이런 3, 40대 남성의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며 영화를 출발시켰습니다. '캡들의 미래는 여전할까, 여전히 그들은 싸움을 잘할까?' 그건 저 역시 여전히 궁금한 것들입니다.


아마추어 복싱 챔피언을 꿈꾸다 지금은 장터국숫집을 운영하는 덕규(황정민)는 가장 공감이 가는 캐릭터였어요. 억울하게 꿈이 좌절되자 훈련된 주먹을 동창생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일찍 죽고 소통이 되지 않는 딸을 키우기에 현재 덕규의 삶은 고단합니다.


과거와 단절하고 대기업 부장으로서 비루한 삶을 사는 상훈은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보였어요. 고교 시절부터 모시던 친구를 여전히 상사로 받들기에, 모든 샐러리맨의 마음을 울릴만한 여지를 두고 있어요. 그가 모시는 상사 진호(정웅인)의 캐릭터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묘사되면서 상훈이란 인물의 현실성도 빈약해졌습니다. 하지만 유준상은 그의 연기 생활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유준상은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반쯤 톤이 올라있는 파이팅이 좋은 배우인데, 이번에는 그 에너지를 누르고 현실을 위해 더럽고 아니꼬워도 참는 상훈의 모습을 잘 재현해 주었어요. 그의 폭발을 이야기가 많이 뒷받침해주지 못해서 아쉬웠죠.


고교 시절의 독기가 여전히 살아있지만, 삼류에 불과한 건달 신재석은 상훈보다 오히려 현실적인 인물이에요. 젊어서 싸움질해 봐야 나이 먹어서 말로가 좋지 않다는 감독의 가르침을 몸으로 재현해 주는 캐릭터입니다.


이들의 케이블 TV '전설의 주먹'에서 승부를 가리기 위해 엮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실제로 이 방송을 보았는데, 아마추어와 프로의 벽은 넘을 수가 없더군요. 세간에서 싸움깨나 한 사람들이 체육인한테는 당할 재간이 없어요. 체력과 스피드에서 월등하게 밀리니 몇 번 헛방을 날리고 후들거리다가, 정타를 맞으면 경기는 곧 끝나는 게 현실이었어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한때 전설이었기에 그보다는 훨씬 뛰어났어요. 한 경기, 한 경기를 풀어가면서 이들은 경기에 적응하고, 관객은 그들의 오늘을 가로 새겼던 싸움꾼으로서의 회상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설의 주먹]은 여러 가지 맛을 내는 뷔페 음식 같아요. 덕규는 딸이 오히려 학교 폭력에 희생자가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드라마의 큰 등줄기를 이루고 있어요. 주먹꾼 아비는  피해자가 되어 돌아온 딸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 볼 만했어요. 한 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면서, 한국 영화의 신파처럼 덕규가 주먹을 잘 못 써서 감옥에나 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스포일링을 한다면 감옥에 가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드라마도 많이 있어요. 전체적인 구색도 좋고 짜임새도 좋습니다. 두 시간 반이 지루하지 않게 템포도 좋습니다. 학교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단절된 세대, 가장들의 고뇌, 남자들의 우정 등,  많은 이야기가 액션과 잘 버무려져 그들의 과거사와 현재의 격투기를 건네주고 교차하며 전달해주고 있어요. 물론 뷔페 식단의 아쉬움은 있지요. 메뉴는 많지만 한 가지 드라마를 진눅하게 우려내진 못해 대표 메뉴가 좀 떨어져 보이는 것이에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리얼스틸]이 오버랩되었어요. [리얼 스틸]은 부성(父性) 하나로만 진솔하게 달려, 깔끔하게 떨어졌는데, [전설의 주먹]은 그 부분이 대조되더군요. 강우석 감독도 이 영화를 통해 부성의 의미를 덕규와 딸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생각해요. 관객으로서는 오히려 남자의 우정이 더 크게 다가와서, 제게는 관객의 취향과 감독의 의지가 잘 대입되지는 않아 보였어요. 그래도 전설의 주먹은 재미있었어요. 배우나 스태프 모두 고생한 보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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