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결단
암환자의 가족으로서 여러 선택의 순간이 온다. 아마 개중 첫 번째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 환자에게 '당신은 암환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나 마냐의 문제이다. 두 번째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암환자라는 사실을 '언제 알려주어야 하는가'이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선적이고 솔직한 대화방식을 좋아했다. 내가 일한 분야에서는 예술가, 혹은 예술가인척 하는 사람이 많았다. 욕망이 차고 넘치는데, 그 욕망을 친절함이나 가식, 선의로 포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프로젝트를 대여섯 개 굴리려면, 그들의 던지는 미사여구의 수식어를 걷어내고 그들의 욕망을 재빨리 드러내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야 대화가 빨리 진행되고 효율이 생긴다. 최소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화의 상대방은 그런 나와의 대화 후에 기분이 좋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말기 암환자라는 사실, 남은 시간이 7개월 정도라는 것을 직선적이고 솔직하게 아버지께 알려드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것인가, 현실을 직시하게 해 드릴 것인가? 내가 아버지라면, 나는 자식이 어떻게 해주길 바랄 것인가?
나는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거기에 희망과 기대를 담아서 말씀드렸다.
"아버지 간암 4기예요. 이미 폐에 전이가 되어있어요. 화학요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다만 아버지가 고령이시니, 암세포도 천천히 자란다면 의사의 진단보다는 더 오래 사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 주변에 간암 4기 판정받고도 5년 더 살고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도 있어요"
이제 세 번째 선택을 해야 될 때였다. 항암 치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 판단으로는 20%의 확률로 성공하고, 성공할 경우 여명을 1년 6개월 연장한다는 것은 확률이 낮고, 보상이 적은 도박이었다. 약물 치료가 쉽지 않을 텐데, 확률도 낮고 보상도 적은 쪽에 아버지를 두고 베팅을 한다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항암 치료를 받지 않는 쪽으로 마음먹었다.
의사인 친구는 항암 치료도 세 단계에서 네 단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그중 첫 번째 라운드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떻냐고 조언했다. 착하고 여린 동생은 아버지가 최소한 5년은 더 사셔야 한다고, 항암 치료를 받으시길 원했다. 그러나 장남이자 형의 권위를 동원해, 그 주장을 가로막았다.
"지금 88세이시다. 지금 주무시다 돌아가셔도 할 말 없는 연세이시다. 얼마나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아버지를 가지고 실험하느냐, 우리 마음 편하자고 아버지를 고생시키는 길이다."
결국 마지막 결정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병원에서 이틀 정도 지난 후,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치료는 안 받겠다. 이제 아픈 것은 싫다. 되도록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아버지의 결정으로 우리는 퇴원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이제 집에서 모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