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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PD Jun 14. 2023

<뿌리 깊은 나무>

2011/10/08

이런 드라마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얼마만에 인간을 이야기하고, 철학이 있는 드라마를 만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천박해진 우리 사회만큼, 우리 드라마도 천박해졌습니다. 드라마라면 모름지기 인간과 세상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감싸는 관계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이런 드라마는 우리 곁에 없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성가시게 왕왕거리던 드라마는 시청률만을 좇는 제작진의 천박함을 반영하듯 오로지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싸구려 사랑과 복수에 시청자의 감정을 인질로 잡으려 했습니다. 지난 수목에 첫 방송을 한 SBS의 [뿌리 깊은 나무]는 그동안 드라마를 통해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없애주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간 우리 드라마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우리 시청자가 앞으로 무엇을 드라마 제작진에게 요구해야 하는 지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드라마다운 드라마를 보게 되어 머리가 다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드라마는 이정명의 원작 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드라마 1,2회는 김영현, 박상연 두 작가의 공덕과 기술로 채워져 있습니다. 태종의 마키아벨리안적인 패도정치와 세종의 인본주의적인 문치(文治)의 갈등이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며 드라마를 출발시킵니다. '재상(宰相)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도전의 이상을 꺾은 무력의 제왕이 바로 태종입니다. 그 태종의 칼부림이 있었기에 세종의 태평성대가 있었다는 게 오늘날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칼부림을 보며 세계와 인간, 제왕으로서의 자신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 고민했을 세종의 심중(心中)을 헤아렸을 역사가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공백이 있기에 사극 드라마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세종의 한 인간적 고뇌의 결과가 후대에 물려준 위대한 유산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걱정되는 바는 이러한 관(觀)의 충돌을 시청자가 이해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모든 권력을 상왕인 태종으로부터 이양받았지만, 군권(軍權)을 장악하지 못해 반쪽짜리 왕 노릇을 했던 세종 초기의 역사가 시청자에게 쉽게 전달되었을지 걱정됩니다. 태종이 단지 권력욕에 집착하는 괴팍한 패왕으로 비추어졌다면, 제왕 철학의 충돌이 아니라 괴팍한 아버지와 유약한 아들로밖에 보이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마방진으로 도피하는 세종의 모습이, 그의 학구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는 했지만, 수(數)에 약한 다수의 시청자에게 현학적인 비유로 보였을까 두렵습니다.


[쩐의 전쟁]과 [바람의 화원]에서 보여준 장태유 감독의 영상 감각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상의 완성도보다 공들여 찍은 장면을 과감하게 재단하며 호흡과 리듬을 불어넣은 편집에 저는 더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사실 대본을 미리 읽어 본 저로서는 각 회의 중 후반 위기에 치달으며, 제왕이면서도 생존의 위기에 빠지는 세종의 긴박감이 기대보다 치밀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만, 최근 드라마 가운데 최고의 완성도를 이뤄냈음을 축하합니다. 


몇 배우의 부조화가 눈에 거슬립니다. 과거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던 캐릭터의 잔향이 남아,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합니다. 이런 문제는 회를 계속해 가며 자연스레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송중기는 이번 역할로 그가 앞으로 수 많은 드라마를 책임질 수 있는 배우임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는 이번에 꽃 미남 배우라는 화관(花冠)을 벗는데 성공했습니다.


모름지기 드라마는 이래야 합니다. 다큐멘터리나 기록보다 더 시대를 이야기하고 사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인물의 행보 하나하나에 그의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자는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반추합니다. 자신의 철학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이 '작품성'의 멍에로 말미암아 '대중'의 찬사를 받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지난 수목, [뿌리 깊은 나무]는 우리 드라마의 수준을 올려놓았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 그 기대가 채워지고, 드라마가 끝나는 마지막까지 지금의 품격과 향기를 이어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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