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PD Jun 15. 2023

카페에서 엿들은 이야기

2011/05/03

카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다른 아주머니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아이를 데리고 빵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먼저 와 있던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시켰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반쯤 숙이고는 인사를 하고 앉았습니다. 먼저 와 있던 엄마는 아이를 잠시 바라보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영수(가명) 엄마야. 영수가 너한테 맞기 싫어서 학교 다니기 싫단다. 어떡하면 좋으니?"


본의 아니게 엿들었지만, 호기심을 못 떨치고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아이는 힘이 세 보였습니다. 거구는 아니었지만, 강단이 있어 보였고, 매서운 성격을 드러내는 듯 눈매가 날카로웠습니다. 때린 아이의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며 아들의 편을 거들었습니다.


  "철수가 어제 학교 끝나고 영수에게 사과했대요. 죄송합니다. 영수 어머니."


영수 엄마는 철수 엄마의 말에는 대응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 죽여놓고 미안하다면 다니? 중간고사 보러 학교 간 아이를 아침부터 따귀를 때리고, 그것 때문에 시험망치고 집에 가는 아이한테, 그때야 미안하다고 그러면 다야?


철수 엄마가 몇 마디 거들지만, 영수 엄마의 마음은 요지부동입니다.


  "영수 아빠는 오늘 만나지도 말랬어요. 학교에 이야기하고 법대로 처리하자고 그래요. 너 철수, 우리 영수가 그동안 당한 괴로움, 너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거 다 어떻게 할래?"


가만 들어보니 철수가 영수를 때린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철수 엄마는 철수가 영수를 '귀여워'한다고 표현했지만, 그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영수 엄마는 일어나며 '나는 너를 용서 못 한다. 한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꼭 처벌을 받게 하겠다.'란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철수'의 표정은 반성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이른 '영수'에게 어떻게 후환이 없는 보복을 할까 고민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이가 있는 부모로서 저는 세 사람의 이야기에서 귀를 떼기 어려웠습니다. '사랑과 용서'라는 덕목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가치인 것은 알지만, 제가 맞은 아이의 부모라면 영수 엄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한 대응은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면 더 안 된 것은 때린 아이 '철수'입니다. 저 어린놈이 벌써 주먹을 쓰고 다니는데, 장차 무엇이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미래가 불안한 것은 오히려 '철수'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게도 중학교 시절 철수 같은 아이가 여럿 있었습니다. 저랑 이니셜이 같은  YS와는 짝이었었는데 참 저를 피곤하게 했습니다. YS의 괴롭힘 대상이 저 혼자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 후 성장하면서 우연히 YS와 조우를 하면 저는 아는 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내게 힘이 있다면 저놈을 반쯤 죽여놓을 텐 데'하고 되뇌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뒤의 삶을 돌아보면서 만약 그때 죽기 살기로 YS와 한 판 붙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본 적이 많았습니다.  영화 '싸움의 법칙'처럼 한 번 갈고닦아서 한 번 붙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길게 남았습니다. 나이 먹고 주먹질해 봐야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아니,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는 거죠.


'사랑과 용서'가 미덕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사랑과 용서'를 통해 피해자의 마음에 남긴 굴욕감과 상처가 온전히 치유될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피해자의 '

사랑과 용서'가 아니라, 가해자의 '사과와 참회'가 우선되어야 할 것인데, 이런 일을 처리할 때 가해자가 진정으로 사과하고 참회하는지 궁급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격리되어야 하고,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어야 하는 사람은 가해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론화되어야 재발이 방지되고, 다른 학생이 보호받습니다.


카페에서 엿들은 이야기로 제가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10년 전 이 글을 썼을 때는 사실 알고 보면 '가해자가 피해자일 수 있다'는 논조였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그런 애매한 양비론은 이런 사안에 맞지 않아, 잘못 썼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글을 옮기면서 그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피해 학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만큼, 가해 학생도 처벌받아야 합니다. 그 처벌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자신의 잘못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와 참회'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전제에서 '사랑과 용서'가 가능합니다. 신이 용서했다고,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가해자는 자신이 괴롭힌 피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받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영화 <밀양>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023/05/15)

작가의 이전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