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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PD Jun 16. 2023

드라마의 징크스

2011/02/04

징크스(jinx)는 사전(辭典)에서는 ‘재수 없고 불길한 현상에 대한 인과 관계적 믿음’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특정한 행동이나 징후가,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개인이나 집단이 믿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징크스는 드라마 제작 현장에도 있습니다. 드라마 제작진이 모여서 정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제작진이 수긍할 것입니다. 시간과 돈, 배우와 스태프의 피와 땀으로 만든 드라마가 실패할 경우, 사후 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분석하면서 이런 징크스를 들이댑니다.


첫째, 총기류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드라마에 총이나 총격 장면이 많이 나오면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가까이는 ‘아테나’가 있었고, ‘로드 넘버원’, ‘전우’, 등이 그렇습니다. 멀리는 ‘백야 3.98’도 있었고, 제가 연출한 ‘무적의 낙하산 요원’도 그렇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최근 ‘아이리스’는 결과가 좋았지요.


두 번째, 자막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입니다. 자막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는 주로 외국 로케이션이 많은 드라마이거나 외국인이 많이 출연하는 드라마입니다. 최근의 ‘도망자’도 그렇고 ‘태양을 삼켜라’, ’ 슬픈 연가’, ‘러브 스토리 인 하버드’가 있습니다. 한참 과거의 예이지만 해외 로케를 한 전쟁 드라마, 대형 드라마가 다들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물론 ‘올인’, ‘파리의 연인’ 같은 예외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도 해외 촬영을 했지만 자막이 많지는 않아서 파국을 면했나 봅니다.


세 번째, 스포츠가 드라마의 주 소재인 경우입니다. 최근의 ‘드림’, ‘트리플’등의 스포츠 드라마들, 과거에는 ‘슈팅’, ‘때려’라는 드라마가 부진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기억도 남지 않고 사라진 격투기 관련 드라마가 뜻밖에 많습니다. 90년대 초기에 방송했던 ‘마지막 승부’ 같은 예외가 있습니다. 또 맛보기로 살짝 스포츠가 거론되고 드라마에 충실했던 ‘해피 투게더’ 같은 성공작도 있습니다만, 스포츠가 주된 메뉴였던 드라마는 고전했습니다. 저도 대학 ‘스포츠 동아리’가 중심이었던 6시 30분 청춘 드라마를 연출한 적이 있습니다. 조기 종영 했습니다.


위의 것이 드라마의 징크스로 거론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총기가 많이 나오는 드라마는 한국인의 정서와 맞지 않아 괴리감이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총기 소유가 불법인 우리 사회에 총격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는 시청자와 정서적 괴리감이 생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대신 한국 시청자들은 도검류와 각목을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막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는 보수적인 TV 시청자에게 편하지 않습니다.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 우리 시청자의 대부분입니다. 하루를 끝내고 다리 뻗고 마음 편히 즐기는 오락이 드라마인데, 화면에서 자막이 나오면 보수적인 시청자를 힘들게 하나 봅니다. 


스포츠 드라마는 제작진과 배우를 가장 고통스럽게 합니다. 스포츠 중계에서는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 장면들 TV 드라마에서 재현하기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배우의 기량이 운동선수를 쫓아가지 못하고, TV 드라마를 위해 박진감 있는 영상을 만드는 동안 모든 제작진이 녹초가 됩니다. 결국, 그 과정에서 이야기가 부실해지고 엉성한 스포츠 장면만 겨우 남게 됩니다. 제가 조연출 한 ‘사랑은 블루’는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제게 가장 힘들었던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결국  그림의 화려함에 충실한 드라마는 이야기가 취약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작진 특히 연출가가 화려한 그림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다, 정작 이야기와 캐릭터, 플롯을 챙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캐스트와 영상을 자랑하면서도 몰락한 드라마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청자는 항상 영상이나 배우보다는 ‘이야기’에 매혹당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드라마 징크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작품 가운데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은 이 금기 사항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드라마에 묘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무덤에 찾아가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나온 드라마는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가 선생께 이런 장면은 결코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징크스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드라마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시청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매 순간, 리얼 타임(Real Time)을 살아가며 자기 임무를 완수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드라마는 과거 지향적입니다. 실체가 없는 유령을 주인공이 그리워합니다. 예를 들어 죽은 애인을 그리워하는 여자와 한 남자의 멜로드라마를 생각해 봅시다. 이 삼각관계는 단적으로 말해 유령과 여자, 그리고 남자 사이의 갈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령을 상대로 한 갈등과 다툼은 공허하고, 쓸데없이 우울합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와 같은 훌륭한 작품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러브 레터]는 죽은 자와의 사랑은 이야기의 액자(Frame)에 불과했습니다. 이야기의 실체는 죽은 애인이 과거에 좋아했던 어느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일종의 미스터리 멜로였습니다. 최근 [사랑에 미치다]란 작품이 있었습니다.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작품을 시작할 즈음, 작가에게 이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이런 장면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전합니다. 그럼에도, 결과가 좋지 않았던 작품은 어느 순간 주인공이 무덤가로 달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는 것이 꼭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일지매에서도 주인공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했는데, 그 아버지는 역모로 돌아가셔서 무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덤 대신 매화나무에 대고 울었습니다. 일지매는 결과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둘째, 잔뜩 무게 잡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주동인물이나 반동인물이 있을 때입니다. 이런 캐릭터는 제 드라마를 처지게 하였습니다. 그 배우가 폼을 잡는 동안 드라마는 괜히 우울해졌습니다. 주인공이건 악당이건 폼을 잡고 긴장을 이완시키고 호흡을 느리게 하는 캐릭터는 제 드라마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물은 앞으로도 만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징크스와는 반대로 길조(吉兆)도 있습니다. 주인공이 서민이어서 고급 승용차 대신 시내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결과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대물의 경우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은 꼭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설정합니다. 


배우들 가운데 행운을 몰고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중견 배우 가운데 허준호, 윤미라 씨는 인기 있는 드라마에 꼭 들어가 있습니다. 대박 작품의 캐스팅 명단을 살펴보시면 두 분의 이름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이분들을 모셔야지 하는 마음이 있는데 저하고는 잘 연결이 되질 않으시더군요. 과거에 연기자 K군은 오디션 하는데 제게 '감독님, 저는 운이 없습니다. 제가 참여한 드라마는 다 잘 안되더라고요.'라고 말하기에, 오히려 캐스팅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 드라마가 잘 되어서 나중에 'K야, 네 징크스는 내가 깨 주었다.'하고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잘 되게 하는 힘은 소극적으로 징크스를 피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징크스에 연연한다면 계속 비슷한 드라마를 만들 우려도 있겠지요. 하지만 '진인사대천명'의 마음으로 드라마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체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징크스는 피하고 길조는 불러들이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이겠죠. 좋은 이야기가 결국 최고의 길조(吉兆) 아니겠습니까?



저는  거의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징크스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막은 이제 논외로 쳐야 할 것 같습니다. TV가 대형화되었고, 해외 OTT가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인 2013년부터 자막을 켜놓고 TV를 보는 시청습관이 보편화되는 것 같습니다. 메디컬 드라마에 자막이 많이 나와도 흥행에 실패하지는 않으니까요.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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