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2010/10/19
한 드라마 작가가 드라마 기획안을 보내왔습니다. 신인이어서 실수도 있었고 고쳐야 할 부분도 있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수정 방향을 논의하다 저는 작가의 감복했습니다. 조언 수준이 아니라 거의 제 드라마를 만들 듯 그 기획안을 검토했습니다. 대 여섯 차례의 수정이 끝나자 이제 그 기획안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제가 기분이 좋았으니 그 작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방송사에 제출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제가 관여한 것이 알려지면 곤란했습니다. 본업 이외의 과외 활동을 열심히 했다면 회사에서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관여한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기획안을 방송사에 제출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 그 작가와 연락이 되어 기획안의 근황을 물었습니다. 그 작가의 기획안은 여러 가지 벽에 부딪히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사건이 제가 이름값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계기입니다.
이름은 과거의 성적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 사람이 얼마만큼 잘했으니 앞으로도 잘하겠지.' 하는 기대감이 이름 있는 사람에게는 주어집니다. 그래서 한 번 성공을 거둔 사람은 다음 프로젝트가 쉽게 풀려나가곤 합니다. 문제는 그 이름이 미래의 성적까지 보장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멀리 예를 들지 않아도 유명 PD와 훌륭한 작가, 톱스타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이름값을 못하고 실망스러운 결과를 낸일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요.
반대로 금방 그린라이트가 켜지고 만사 일이 잘 풀렸을 프로젝트들이 이름이 없어서 좌절된 예가 많습니다. 드라마는 방송 횟수가 길어질수록 관록에서 나오는 작가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이름 없는 작가가 연속극을 맡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다름없습니다. 방송 횟수(경우의 수)가 많아질수록, 이름 있는 작가가 믿을 만한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인은 서럽습니다.
과연 실제로 이름값이 작용할까요? 이름값이 실린 프로젝트의 성패 여부를 따져보면 성공하는 만큼 실패의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이름 있는 연출자나 작가가 성공할 경우, 그 성공이 과대하게 포장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 이름이 확실히 각인됩니다. 성공작은 기억하지만, 실패작은 곧 잊는 우리의 어리석음도 이런 과대포장에 기여합니다.
저는 드라마의 기획안을 이름을 가리고 심사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유명 작가나 PD의 기획안도 제가 겪은 경우처럼 퇴짜를 맞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에 기대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기획안을 제출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정말 훌륭한 기획안이나 프로젝트가 이름 없는 설움으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분한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름 있는 사람이건, 이름 없는 사람이건, 맹수가 초식동물을 사냥할 때처럼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위의 사건으로 저는 제 이름값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명하지도 않지만, 과거의 성공에 기대어 미래의 성공을 예상하는 어리석은 도박은 저부터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글을 쓴 3년 후 대학원에 박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쓰게 된 박사 논문에서 실제로 이름값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20년간의 드라마 시청률과 작가를 분석하며 연구한 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름값이 높은 시청률의 드라마와 상관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름 있는 작가는 권력이 생기고, 그 권력으로 A급 리소스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A급 연출과 배우가 모여, 시청하지 않으면 안 될 큰 드라마들이 제작되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쓴 이 글을 보니, 이때 가진 문제의식이 제 박사 논문의 연구 주제를 잡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듭니다.(2023/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