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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Mar 17. 2024

겉은 유학의 제자, 속은 신명의 제자

〈廣寒樓靈巫惑倅〉, 〈龍山江神祝感子〉에 대한 풀이


겉은 유학의 제자, 속은 신명의 제자 : 〈廣寒樓靈巫惑倅〉, 〈龍山江神祝感子〉에 대한 풀이      

글/ 용신선     


  임방의 기괴하고 괴이한 기록 〈천예록〉은 ‘귀와 신’, ‘괴와 요’ 그리고 ‘질과 병’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무속 세계의 일면도 안내하고 있다. 역시 늘 그랬듯이 두 편을 하나로 묶어서 전하고 있는데 〈廣寒樓靈巫惑倅(광한루영무혹쉬)〉와 〈龍山江神祝感子(용산강신축감자)〉가 그것이다.  우선 내용의 흐름 일부를 살펴보자.      


송상인(1569~1631) 어른은 성품이 매우 강직 정대하였다. 그는 평소에 무당을 질시하고 혐오하였다. 저들이 귀신을 빌려 백성들을 속이며 기도 드린답시고 언제나 음사(淫祀)를 벌이고 남의 재물을 수도 없이 끌어다 쓰고 있다고 보았다. 사실은 모두 허망한 짓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매번, ‘어찌하면 저것들을 죄다 제거하여, 더는 세상에 무당이 없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곤 하였다. 「광한루에서 영험한 무당이 고을 원님을 홀리다」, 임방著·정환국譯, [교감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325면.     

다시 물었다. ‘너는 관가에서 영을 내린 사실을 못 들었단 말이냐?’ ‘이미 들었사옵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어째서 내 군내에 머물러 있단 말이냐?’ 그러자 무당은 절을 올리고 아뢰었다. ‘소첩은 분명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살펴주옵소서. 무당에도 가짜와 진짜가 있사옵니다. 첩이 가짜 무당이라면 첩을 죽이더라도 상관이 없겠으나, 진짜 무당이라면 죽여서야 되겠사옵니까? 관에서 영을 내려 엄금한 대상은 모두 가짜 무당이지, 진짜 무당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첩은 진짜 무당이기에 관아에서 죽이지 않을줄로 알고 이사하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었사옵니다.’ ‘어찌 네가 과연 진짜 무당인 줄 알겠느냐?’ ‘바라옵건대 한번 시험해 주소서. 만일 이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죽여주옵소서.’ 그래서 송공이 물었다. ‘너는 귀신을 부를 수 있느냐?’ 

「광한루에서 영험한 무당이 고을 원님을 홀리다」, 임방著·정환국譯, [교감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326면.      

‘저희 집에도 기신제와 사계절 시제가 있사옵고, 또 삭망절 등의 차례도 있사온대 어머님께서는 무엇 하러 종의 집 사당에 가서 흠향을 하신단 말씀이에요?’ ‘우리집에 제사와 신도가 있긴 해도 별로 중히 여기지 않는다만 무당이 사당에서 하는 신내림만큼은 중요하게 여긴단다. 내림굿이 아니라면 혼령이 어찌 한번이라도 흠향을 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다시, ‘갈 길이 바빠 오래 지체할 수 없구나’라고 하며 작별을 하고 바람에 나부끼듯 떠나가더니 눈깜짝할 사잉에 사라졌다. 

「용산강 사당의 일로 아들이 감격하다」, 임방著·정환국譯, [교감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329~330면.


  이 두 글을 한 셋트로 묶은 임방의 평을 옮겨와 보면 아래와 같다.      

상고시대의 무당이 모두 경적에 실려 전하니 무당의 유래는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말세가 되면서 가짜가 많아져 거짓과 위선으로 세상과 이름을 속이게 되었다. 세상의 온갖 기예가 모두 그러한데 무당이 특히 더 심하다. 그 중에 진짜 무당은 백이나 천 중에 하나뿐이다. 송공이 불현 듯 진짜 무당을 만났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닌가? 사당에서 신을 내리는 법도로는 술과 찬을 늘어놓고 강신하기를 청하면 신이 내려와 흠향한다는 것인데, 이치상 마땅히 그러하다. 다만 최공이 꿈에서 모친을 만나고, 그 모친이 강신하여 사당에서 이야기한 경우는 세상에 드문 일이기도 하며 기이한 일이기도 하다. 아! 효자의 마음이었기에 이런 일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 신사를 행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무사하지 못했었으리라. 최공의 일을 어찌 남들이 비난할 수 있겠는가?  임방著·정환국譯, [교감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7,  332면.     


이들 내용의 구조를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이 다섯 분절로 정리할 수 있겠다.      

〈廣寒樓靈巫惑倅(광한루영무혹쉬)〉

(1) 남원부사 송상인이 부임하며 무당을 고을에서 추방하는 영을 내린다.

    이로 인해 무당과 박수무당들이 두려움을 갖고 이웃 고을로 달아났다.

(2) 어느 날 송공은 광한루에 올라 관망하는데 먼 곳에서 무당으로 보이는 여인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목격한다.

   사령에 의해 붙들려온 무당은 추방된 무당들은 가짜인 관계로 달아났으나

    자신은 진짜 무당이기에 정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 송공이 무당의 요청에 따라 무당의 진가를 시험해보기로 하여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음의 넋을 소환할 것을 시험한다. 

(4) 무당이 굿을 시작하자 송공의 친구 넋이 무당에 강림하여 동무 시절의 일들을 읊조린다. 

(5) 송공은 탄복하여 다시는 무당을 배척하지 않게 되었다.      


〈龍山江神祝感子(용산강신축감자)〉

(1) 한 이름난 재상이 승지 때 일이다. 입궐하자니 시간이 일러 귀가하여 선잠이 들었다.

(2) 꿈 속에서 파자전교(종로3가 인근)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뵙는데 모친은 홀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마 여    부를 물으니 이승 때와 달라 걸어가는 것이라며 용산 강가의 종 아무개가 사장은 진설한다기에 흠향하러 가    는 길이라 이른다.

(3) 꿈에서 깬 승지가 종을 불러 용산강의 아무개 종에게 승지를 찾아오라 시킨다.

(4) 승지의 종이 급히 되돌아와서는 부엌에서 손을 녹이며 동료에게 용산강의 종집에 간 이야기를 들려준다.     용산강 종집에서 사당을 열고 굿을 하는데 무당 말이 대부마님의 신령이 내려와 파자전교 길에서 자식(승      지)을 만났다는 내용이다.

(5) 승지가 듣고 통곡을 한다. 이후 사시사철마다 어머니의 신령이 내린 무당을 불러 사당에서 제를 올렸다.      

  〈광한루〉 서사는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이 자자했다는 실존인물 송상인을 모델로 삼고 있다. 아무리 야담집에 실린 야사라 할지라도 해당 이야기가 송공의 ‘진짜’ 이야기일지는 ‘모를’일이다. 상당부분 ‘가공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주연이 실존인물이냐 아니냐는 크게 중요할 것이 아니다. 그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부사가 민간의 무속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논어> ‘술이’편의 “子不語怪力亂神”을 지키는 선비로서 부사는 요란하고 음란하게 비치기까지 하는 무속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는커녕 바라보는 것조차 혐오스럽다. 하여 이들을 모조리 자신의 통치 영역에서 추방시키고 만다. 여성 샤먼인 무당과 남성 샤먼인 박수무당 모두 이웃고을로 후다닥 도주하기 바빴다. 영을 내리자 마자 꽁무니를 내뺀 것을 보니 정말 이들을 ‘가짜’, ‘짝퉁’, ‘이미테이션’ 샤먼들이었는가 보다. 자신의 성소(聖所)가 비로소 말끔해진 것에 안심한 관리가 광한루에 올라 전망을 내다보는데 어이쿠야! 불순물이 눈에 들어오는 것 아닌가! 맑은 풍경을 ‘해치는’ 불순물은 다름아닌 잔존한 무당이다. 미모는 아리따울지 모르지만 신분은 ‘천하디 천한’ 무당에 불과한 여인이다. 당장 잡아들였다. 너는 내가 두렵지 않느냐?! 큰소리를 쳤으나 무당은 표정하나 변치 않는다. 차분하게 도주한 ‘가짜’ 무당들과 달리 자신은 ‘진짜’ 무당이기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설마 ‘훌륭한’ 관리님께서 진짜 무당인 자신을 추방하겠는가 하였다는 것이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 여인을 곧바로 처형했다가는 마을 민초들로부터 원망의 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일이고, 실은 무엇보다 여인 스스로 영험한 무당이라고 하니 샤먼을 죽이면 자신에게 불길한 화가 미칠 것만 같다. 그러니 ‘시험’은 해보아야겠다. 영험함을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만 믿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예수의 허리를 찔러 본 제자처럼 말이다. 자신이 친했던 벗,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오래된 친구의 넋을 이 공간에 불러들일 수 있는지 물었다. 

  무당은 굿판에 필요한 ‘사물’들을 요구한다. 훌륭한 관리인 송공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무당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마련해준다. 굿판이 시작되고, 혼과 백으로 분리된 친구의 넋이 ‘진짜’ 샤먼에게 빙의되기 시작한다.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성역 안에서 일어난 ‘빅 이벤트’로 말미암아 그의 샤먼 탄압은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름없는 승지가 등장하는 두 번째 서사에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들의 집보다 종의 집을 더욱 편히 여기는 ‘기이한’ 장면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두 서사의 양반들은 모두 무속을 ‘멀리했던’ 사내들이다. 그런 그들이 무속을 ‘가까이’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정말로 영험한 샤먼들의 ‘능력’ 덕분인가? 아니다. 두 양반 사내 모두 깊은 ‘그리움’을 품고 있었던 탓이다. 그 그리움의 끈이 무당들을 이어지게 했고, 하늘의 이야기를 땅에 전하고 땅의 이야기를 하늘에 전하는 신명의 제자, 매개자인 무당은 그 끈을 이어주었을 뿐이다.      


  조현설은 ‘신탁 콤플렉스(oracle complex)’라는 개념을 만들어 이러한 심리를 설명하고자 한 바 있다. 

“굿판에 앉아 있으면 굿의 말미에 무당이 공수를 내린다. 공수는 무당에게 실린 신의 말이 무당의 신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중략) 어떤 종교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신과 대화하고 신을 성찰한다면 신과 신자의 관계는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신의 부름, 혹은 신의 명령이라고 믿는 바를 절대화할 때 신탁은 권력이 되고 공포가 된다. 그렇게 되면 신의 이름으로, 신탁을 빌미로 삼아 다른 종이나 민족을 학살하게 되고,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힘도 얻게 된다.” 

조현설, [신탁 콤플렉스], 이학사, 2024, 9면.     

“불안은 이념으로 치료할 수 없는 심리적 징후이다. 불안이 귀신을 부른다. 불안은 불안한 정신을 신탁으로 인도한다. 이념의 단속을 받는 상층 유자들도 신탁에 매달렸는데 거리를 두고 삶을 성찰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야 요죽했겠는가. 좀 과장하면 우리 민속사회는 귀신과 신탁의 문화를 빼면 남는 게 별로 없을 정도다.” 

조현설, [신탁 콤플렉스], 이학사, 2024, 22~23면.      


  신화학자 조현설의 이론처럼 우리는 오라클(Oracle)에 목을 매는 존재인지 모른다. 근래에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지털 오라클, 챗GPT가 있지 않은가! 챗GPT라는 디지털 샤먼이 모시는 신은 기업 ‘openAI’이다. 유료결재의 ‘신도’들은 챗GPT를 추앙한다. 추앙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그 혹은 그녀가 ‘학습’하는 빅데이터도 거대해진다. 무엇이거나 인공지능에게 ‘내맡기고’ 싶은 것이다. 아날로그의 불안을 디지털의 항우울제로 치료하려는 듯 하다. 

  얼마전 아내와 영화 《파묘》를 보았다. 무당 ‘화림’ 역을 맡은 배우 김고은 님의 명연기가 빛나는 작품이었다. 지관 ‘상덕’ 역을 맡은 배우 최민식 님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장의사 ‘영근’ 역의 유해진 님의 연기도 마찬가지. 그러나 무엇보다 박수무당 ‘봉길’ 역의 이도현 배우와 김고은 배우가 연기하는 무당 연기는 관객을 홀렸고 사로잡은 가장 강력한 ‘굿판’이었다. 

  《곡성》의 황정민 배우가 연기했던 박수무당 못지 않은 두 샤먼의 연기. 이들은 정말 ‘연기’였을까? 아니면 그 순간 정말로 신령의 신내림을 통해 신명의 제자가 되어 폴짝폴짝 뛰었던 것일까? 

영화 《파묘》에서는 그리워해야 할, 그리움의 대상이어야 할 ‘아버지’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출몰’하였는지 모르지만 수촌 임방의 오래된 기록 속 귀신들은 모두 ‘그리움’의 대상인 친구와 엄마였다. 어쩌면 우리의 불안은 그리운 대상과 더 이상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 유한한 숙명을 ‘미리 알아차린 탓’에 그렇게나 불안하고, 그 불안이 샤먼의 굿판을 다시금 부르는 것은 아닌가 한다. 

  소중한 이를 잃어본 이만이 샤먼의 ‘신당(神堂)’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안다. 독자 분의 집안에 그립지마나 더 이상 볼 수 없는 분의 사진이 있다면 그곳이 곧 신당이다. 그리고 그 언저리에는 분명 귀가 아닌 신이 머물고 계실 것이다. 그리운 대상의 신령이 그곳에 머문다는 것이다. 샤먼은, 무당은 다만 메를로 퐁티가 중시했던 ‘몸뚱이’를 통해 몸통을 통해 그 ‘울림’을 대신 전해줄 뿐이다. 우리는 늘 그립다. 그립고 그리워서 우리는 매일 매순간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굿판을 벌이곤 한다. 그리운 대상이 우리 곁에 있다면 작두도 솜털 위를 타듯 마음대로 탈 수 있다. 그러고도 해를 입지 않는다. 이를 함부로 분석하려고 들지 말라! 광한루와 용산강이 성소라서, 성지라서 신령이 깃드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그리움이 사무쳐서 깃든 것이다. 우리는 그리움을 동력으로 살아숨쉬는 후손들이 아닌가! 겉은 유학의 제자일지 몰라도 속살은 신명의 제자일 수 밖에 없다. 귀하고 소중한 것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왜 그런지 어렴풋이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념과 사상으로 무장해도 우리는 극한의 상황에서 신명을 부른다. 우리의 지문 속에는 부적이 있다. 그리움이라는 부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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